[영화읽기]
세련된 미스터리 스릴러 <올드보이>
2003-11-27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다시 원형적 욕망을 선택하다

<올드보이>는 아주 잘 만들어진(well-made)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다소 진부하고 도식적으로 말해보자면, <올드보이>는 감독의 두 전작(<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의 종합판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미스터리 스릴러적 플롯과 비극성(그것은 주체가 알지 말아야 할 자신의 비밀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 폭발한다),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의 편재성’(차라리 인간의 ‘원형적 욕망’의 편재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이라는 테마. <올드보이>를 통해 감독 박찬욱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서서히 그러나 치밀하게 ‘복수’의 감정을 응축시켜가다가, 정교한 반전을 통해 그러나 폭발적으로 인간의 ‘원형적 욕망’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그의 이야기 솜씨와 연출의 리듬. 특히, 감독의 냉정하게 계산된 연출 리듬과 배우들(최민식, 유지태)의 열정적인 연기 호흡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반전의 순간의 파토스는, 잠시 머리가 멍해질 만큼 그렇게 매혹적이다.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오히려 그것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신화’에 기대고 있다), 그것을 새로운 느낌으로 현재화시켜내는 힘. 그것은 연출력과 연기력, 그중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박찬욱은 체질적으로 ‘체험’이라기보다는 ‘교양’에 자신의 영화적 뿌리를 대고 있는 감독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그 체질적 건조함이 갖는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어떤 배우(연기)가 필요한지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적인 것’은 영화(감독)가 언뜻언뜻 내비치는 냉소적인 제스처이다. 그것은 영화적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한국영화의 ‘화두’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래서 박찬욱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조금은 ‘고약’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말하면서 숨기고, 숨기면서 말하기를 즐긴다. 그는 ‘과잉’으로 느껴질 만큼 늘 ‘중의법’으로 말한다. 그는 영화를 통해 세상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영화 그 자신에 대해서 말하곤 한다.

숙명적 귀결점으로서의 ‘신화적 비극’

<올드보이>는 감독이, 마치 <복수는 나의 것>의 (흥행) 실패(?)에 대해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이, 마음먹고 만든 A급영화이다. 그것은 세련된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주류적(?) 화법으로 관객의 감성을 사로잡는다. 특히 메인타이틀이 올라가고 있는 영화의 초반부, ‘장르적’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렇게 충분히 관습적인 컷과 사운드의 구사는, 이 영화에 임하는 감독의 태도(결심)를 예시(豫示)한다. 감독이 드러내는(또는 숨겨놓은) 또 하나의 예시. 오대수(최민식)는 술로 떡이 된 채로 딸에게 전화를 건 뒤 갑자기 사라진다. 카메라는 그가 사라진 그 거리를 서서히 올라가며 부감으로 잡아내는데, 이윽고 ‘신의 시점’에 도달한 그 카메라가 잡아내는 것은, 도로 위에 그져진 일방통행 안내 표지판이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의 벡터를 가리키는 화살표와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금지의 X표가 공존하는 그것. 그것은, 오대수가 딸의 생일 선물로 준비한 ‘천사의 날개’와 함께,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인간의 ‘원형적 욕망’과 그것의 숙명적 귀결점인 ‘신화적 비극’의 세계임을 말하고 있다. 그 원형적 욕망은 ‘신화’라는 알레고리를 통해서만 우리가 엿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세계이다. 신화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그 욕망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 그것은 많은 주류영화들이 그 문제를 다룰 때 즐겨 사용해왔던 하나의 관습이기도 하다. 또한 그 서사적 관습은 ‘보일 듯 말 듯’한 것에 대한 관음적 욕망에 의존하거나 그것을 유발한다. 아마도 이것이 <올드보이>가 유난히도 ‘여자의 무릎’에 대한 시각적 페티시즘(fetishism)을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 무릎에 대한 육욕의 페티시즘은 미스터리가 자극하는 지적 관음증의 상관물이다. 신화를 통해서 그 근원적 욕망을 말한다는 것, 그것은 적당히 가린 채로 여인의 속살을 보는 것과도 같다.

전능한 '주인'조차 운명의 노예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시점의 주인, 즉 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설계한 게임 속으로 오대수를 포획한 이우진(유지태)의 시점이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이우진의 ‘전지적 시점’에 의해 포착되고 기록된 이야기이다. 그는 모든 장치(카메라, 녹음기, 심지어는 벽지 문양의 눈)를 이용하여 오대수를 포획하고 통제하며, 심지어 그(오대수)가 자신(이우진)이 원하는 것만을 볼 수 있도록 그의 ‘기억’을 지배하기조차 한다. 비극적인 것은, 그 전능한 신(주인)조차도 사실은 운명의 노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시점은 또한 관객을 내려다보는 감독 자신의 시점이기도 하며, 그래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오대수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것은, 왜 그리고 언제까지 자신이 갇혀 있어야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관객인 우리가 이 미칠 것 같은 답답함(“아저씨, 내보내달라고 안 할게요, 제발 언제까지 있어야 되는지만 말해줘요!”)을 공유하게 되는 그 순간, 그 순간은 우리가 감독의 노예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이 영화는 철저하게 감독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순간에만, 우리가 보거나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마치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그렇게 하고 있듯이. 미스터리 스릴러의 교과서적인 각본!). 심지어 감독은 극중의 한순간, 스스로 이우진이 되어 관객을 똑바로 노려보며 질문을 던진다.

“너희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질문은 망각(억압)하지 않고서는 진실(욕망)과 대면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물음이면서, 동시에 영화(신화/스크린)를 통하지 않고서는 진실(욕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가라는 의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질문을 던지는 신경질적인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내 눈에는 느닷없이 그 질문을 내던지는 이우진=감독의 태도 속에서 인간의 비극적 숙명에 대한 분노/절망이라기보다는 냉소적인 신경질이 느껴졌다.) 이 장면은 영화의 다른 곳에서 던진 또 하나의 질문(오대수가 사설 감금업자 일당들에게 느닷없이 내던지는 혈액형에 대한 질문. “너희들 중 AB형 있어?”)과 함께 감독 자신의 깊은 자의식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개인적 욕망 vs 사회적 욕망

이렇듯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좀더 정확하게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 이후) 감독이 매달리고 있는 자신의 영화만들기에 대한 자의식적 고민과 질문(A냐 B냐?)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과 함께 2부작을 이룬다. 감독 자신은 두 영화를 ‘복수 2부작’으로 엮는 것에 대해 불만스러워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보이>는, 많은 주제적, 시각적 모티브들을 통해, 스스로 <복수는 나의 것>과 연장선에 있음을 과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폐소공포증적 현기증을 유발하는 실내 벽지의 문양 또는 색감, 비극의 씨앗이 배태된 장소로 주체를 유도하는 지그재그형 계단의 불안한 이미지, 복수(욕망)의 드라마의 대단원에 존재하는 ‘물’의 원형적 이미지, 그 욕망의 드라마가 그럴듯하게 작동하도록 매개적 기능을 하는 정체불명의 수상한 집단들(장기밀매업자, 혁명적노동자동맹, 사설감금업자)…. 스스로 과잉일 정도로 드러내놓고도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독 자신의 부정을 일단 인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복수는 나의 것>의 주제적 모티브에 대한 사후적인 재해석을 통해서, 두편의 영화를 ‘욕망의 2부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작품은 주제적 모티브의 측면에서 근본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의 주제, 즉 ‘복수의 편재성’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욕망에서 비롯되며, 그 두 가지 욕망은 영화의 두 가지 주제적 모티브가 된다.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것이다. 근원적인 근친상간적 욕망과 계급적 갈등(원한).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 두 가지 모티브는 서로 대등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또는 아주 어설프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치영화’로서의 그것은 아주 어정쩡한 제스처에 머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아직 전자(근친상간적 욕망)가 후자(계급적 갈등)의 가면을 쓰고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욕망’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조차 좀더 근원적인 주제적 모티브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류(신하균)와 동진(송강호)의 광기에 가까운 원한과 복수심은, 그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좀더 ‘원형적인 욕망’을 전제하지 않는 한,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는 그러한 혐의를 둘 만한 상황적, 시각적 설정이 이미 많이 놓여져 있다. 류의 누나는 이미 누나이자 어머니였고, 류는 병든 누나를 누나 이상의 감정으로 보살핀다. 아내와 이혼한 동진에게 딸은 이미 각별한 존재였다.

죽은 딸에 대한 복수를 사회의 법에 맡기기를 거부하는 그의 분노, 굳이 딸이 죽은 바로 그 장소에서 제의를 치르듯 이루어지는 류에 대한 신성한 복수 행위, 이미 그것은 원형적이고 신화적인 욕망의 징후였다. <올드보이>는 바로 이 근원적 욕망의 모티브를 전경화한다. <올드보이>는 영미와 팽기사(사회적 이념과 계급적 고통/원한)가 빠진 <복수는 나의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두 영화 속 인물들간의 상동적 관계를 도식화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할 만큼 그것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올드보이>는 박찬욱이 <복수는 나의 것>에 이어, 다시 한번 던진(물론 좀더 안전한 방식으로) 주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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