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찬은, 그동안 설경구의 몸을 빌린 캐릭터들 가운데 유일하게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684부대에 합류한 그는 주변인이긴 하나 자신감에 차 있다. 그래도 어딘가 비어 있기는 지금까지의 역할들과 다를 바 없다. 어딘가 비어 있는 인물, 주/변/인. 설경구는 극 안에서건 밖에서건 늘 주변인의 삶을 산다. 극 밖에선 편해서 그렇게 산다지만, 꼭 주어지는 역할도 그렇다면 이상한 궁합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강인찬은 그리 큰 배역은 아니다. 그럼 주인공이 아닌 거냐고? 이 영화엔 주인공이 없다. 33명의 부대원이 모두 주인공이다. 그래서 <씨네21> 표지촬영 때도 설경구는 박박 우겼다. 모두 다 주인공이니까 함께 찍자고.
작품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건 한 가지다. 재밌으면 가는 거다. 요즘엔 하나가 더 생겼다. 믿음이 가는 감독이라면 두말없이 쫓아간다. 배역과의 궁합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감독과는 궁합이란 게 있다. <오아시스>가 그러했듯 <실미도> 역시 제목도 모르고 시작했다. 이창동 감독과 강우석 감독은 인간적 믿음을 주는 감독들이다. 설경구는 대본을 외우는 것과 리딩(대본 읽기)을 무지 싫어한다. 혼자만의 감정이 생겨날까봐서다. 집에서 혼자 연습하면서 생기는 감정, 대사톤, 얼굴 표정, 몸짓은 감독의 의도, 영화의 의도에 반할 수 있다. 대본을 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슛 들어가기 전 이렇게 외친다. “설경구씨, 우리 대화합시다.”
강우석 감독이 5년 만에 <공공의 적>을 찍을 때다. 하도 대사를 안 외워가니까 빌더라. “경구야 나 좀 봐주라.” 그런데 지금은 이해를 해준다. 어떻게? 총부리를 겨누고 대사를 치는 장면에선 총대에다 대본을 끼워준다. 처음 작업하는 감독에겐 양해를 구해야 한다. 리딩은 그냥 책 읽는 걸로 하겠습니다. 감정은 극의 흐름을 타는 것이고, 연기는 감독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다. 대본을 보다가 간혹 ‘이 대목에서 왜 이런 말을 했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으면 꼭 일러준다. 앞을 봐. 캐릭터 분석은 시나리오 작가가 혹은 감독이 한다. 감정이나 행동의 이유는 각본에 다 나와 있다. 그런데도 혼자서 고민하고 캐릭터를 창조하는 인물들이 있다. 설경구는 감독만 믿는다. 그래도 거저 먹는 연기는 아니다.
이창동 감독은 리허설을 무지하게 하는 감독이다. 그래도 꼭 이 말 한마디는 빼먹지 않는다. “지금 하는 건 연습이니까 감정 다 쓰지 말아요.” 연습을 자꾸 하면 감정마저 익숙해진다. 익숙해진 감정은 작업을 방해한다. 그래서 현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TV 보고 시시덕거리다가 온다.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고 카메라 앞에 서면, 적어도 대사 대신 말이 입에서 나온다. 감독님, 우리 이제 대화할까요? 강우석 감독은 인찬을 설경구에게 맡겼다. 처음엔 다른 역을 줄 거라 생각했는데, 보기보다 멀쩡한(?) 역이 돌아왔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현장 증인의 육성 고백을 참조한 게 다다. 글이었으면 그나마 안 읽었다. 감독은 모두가 역사의 희생자인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적은 안기부라고 했다.
감독의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안기부가 적이었구나. 가만, 안기부 직원들도 결국 희생자 아닐까. 그럼 안기부 부장만 적이라고 치지 뭐. 그렇게 영화가 끝났다. 고생이라는 말도 값싼 표현이다. 모두들 악바리가 됐다. 다음 작품은 <역도산>이다. 몸무게를 90kg까지 늘려야 하기에 계속 찌우는 중이다. 하루에 4시간씩 운동하고, 강남에서 일어 공부하고, 아, 죽겠다. 이렇게 강행군을 하면 원래 있던 살도 도로 빠질 지경이다 설경구씨, <실미도>에서 연기변신 기대해도 될까요? 연기변신, 그런 거 없다. 설경구가 나온 영화를 죄다 빌려다 한나절 앉아서 붙잡고 봐라. 다 똑같다. 다음에 찍는 영화 포스터엔 이런 말을 붙이고 싶다. 연기변신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