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미야자키 1992년작 <붉은 돼지> 한국개봉
2003-12-16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왜 내가 돼지로 살게? 파시스트보다 돼지가 나으니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세계 애니메이션의 걸작목록을 하나씩 추가시키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2년작 〈붉은 돼지〉가 국내 개봉한다. 미야자키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은 돼지〉도 오래전부터 불법복사 테이프를 통해 ‘아는 사람’에게는 다 알려진 걸작 중 하나다.

〈붉은 돼지〉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경고와 공중비행으로 상징되는 자유의지 같은 미야자키 작품의 공통분모를 담고 있으면서도 몇가지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거리를 둔다. 우선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린아이나 소녀가 아니라 나이든 돼지다. 1차대전이 끝난 1920년대 말 돼지 포르코 로소는 무인도에서 혼자 지내며 하늘의 해적인 공적을 소탕하고 그 현상금으로 살아간다.

스스로 마법걸어 돼지로 변신

본래 마르코라는 이름의 공군비행사였던 그는 전쟁이 끝난 직후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된다. 그는 왜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게으름과 미련함의 상징인 돼지가 됐을까 국가를 위해 기부를 권하는 은행원에게 “애국은 인간들이나 하시지”라고 툭 던지거나 왜 돼지가 되었냐는 소녀 피오의 질문에 “파시스트보다는 돼지가 나아”라고 내놓는 대답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이처럼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의 다른 작품들보다 성인 관객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주제와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이유 중 일부는 어느덧 중년이 돼버린 감독 자신을 위해 만든, 자전적 성격에서 연유하기도 한다. 본래 기내 상영용 단편으로 준비하다가 유고 내전, 소비에트 붕괴 등을 지켜보며 감독은 90분이 넘는 장편 프로젝트로 바꾸었다고 한다.

무인도에 살며 현상금 사냥

그러나 반파시즘과 무정부주의적 성격이 짙게 배어 있다고 해서 〈붉은 돼지〉가 무거운 성인물은 아니다.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답게 화사한 색감으로 가득한 화면과 복고적 느낌을 주는 비행기 그림들이 아기자기한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내용에서도 포르코의 적이지만 여자 앞에서는 주책스럽게 망가지는 미국인 도널드 커티스와 인질로 잡은 유치원생들에게 쩔쩔매는 공적 등 정말 미워할 만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세명의 공군비행사 남편을 차례로 전장에서 잃었으나 좌절하지 않는 여성 지나와 17살의 소녀 비행기 정비사 피오 등 이 작품에서도 여성은 삶의 긍정과 에너지를 보여주는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미워할만한 인물 하나도 없다

전작들에서도 비행기와 비행장면에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 미야자키의 자전적 작품답게 이 작품에서 클라이맥스는 포르코가 그의 빨간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이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그 사이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섬들 사이로 비행기가 자유자재로 활강하는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깊이 터져나오는 짜릿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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