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는 복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 사법의 체계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사법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감독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그대로 갚아주는’ 복수를 다루고 있지 않다. 영화는 오대수의 죄목이 ‘말’이었다는 점에서, 언어에 대한 극으로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는 단지 간접적으로 매개할 뿐, 사태의 본질을 창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어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그렇다면 근친상간에 대한 영화일까? 영화 속 근친상간은 ‘순수한 사랑’이자 ‘죄’이자 ‘형벌’이자 심지어 ‘권능’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정작 영화는 근친상간에 대한 진지한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다. 근친상간은 일종의 알레고리로 차용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 영화는 근친상간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영화는 놀랍게도 파시즘에 관한 영화로 읽힌다.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행하는 심판의 방식은 파시즘의 논리와 놀랄 만큼 흡사하며, 오대수가 그 형벌에 반응하는 방식 역시 파시스트로서 투항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1. 정당한 복수인 양 가장하고, 언어(소문)가 본질인 양 호도하다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행하는 것은 ‘복수’가 아닌 ‘분풀이’다. 복수의 격언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고, 분풀이의 격언은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 가서 눈흘긴다’이다. 복수는 대상과 방법이 상호대칭적이고, 회귀적이며,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복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정통 복수극 <복수는 나의 것>을 떠올려보자. 류는 누나가 죽자 장기밀매업자들을 죽이고, 동진은 딸이 죽자 영미와 류를 죽인다. 영미의 동지들은 동진을 죽인다. 동진은 딸이 죽은 강에서 류를 죽이면서 정확한 복수의 변(辯)을 날린다. “나, 너 착한 놈인 것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것 이해하지?” 근대 국가성립 이후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사법권을 경유하지 않고 동진은 직접적인 되갚음, 즉 사형(私刑)을 가하고 있지만, 그의 집행은 예외없는 법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류가 착한 놈이건 나쁜 놈이건, 고의이건 과실이건,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 복수의 심판을 받으며, 그 심판의 법리는 심판되는 자에게도 ‘이해’됨을 전제로 한다. 반면 분풀이는 그런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해하지 않은 엉뚱한 대상, 주로 약자를 대상으로 삼으며, 때로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피해당사자는 이유를 모르고 억울하다. 분풀이는 대상은 물론 방법도 비대칭적이다.
오대수는 영화의 중반까지 자신에게 가해지는 사형(私刑)의 이유를 모른다. 그는 자신의 법을 집행하고 있는 이우진으로부터 납득할 만한 재판을 받지 못한 채 감금된다. 15년간 감금되었다 풀려나서 그는 자신이 감금된 이유, 즉 자신의 죄목을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마침내 오대수는 감금의 이유를 찾아낸다. 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재판과 형벌의 완성이다. 그는 자신이 찾아낸 이유를 가지고 이우진에게 재판을 받고, 예비된 최종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재판은 이미 결론이 주어진 채 행하는 요식행위이며, 이를 거쳐 임시적인(15년이 임시라니!) 구속이 아닌, 본격적인 형벌을 가하기 위한 절차인 셈이다.
재판에서 비로소 공개된, 20년 전에 작성된 공소사실은 이런 것이다. 이우진과 누나는 자연스러운 사랑으로서 근친상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 오대수는 ‘수아가 학교에서 어떤 남자애와 섹스를 하더라’라는 말을 친구에게 남기고 전학을 갔다. 그뒤 학교에는 ‘수아는 걸레’라는 소문이 퍼지고, 급기야 임신했다는 소문이 나자, 수아는 상상임신을 한다. 우진과 수아는 임신으로 인해 근친상간 사실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하다가 수아가 자살하고 만다. 즉 ‘사랑→소문→임신→금기→죽음’의 과정을 따랐다. 이우진의 공소장에 의하면, 남매는 그 이전까지는 아무런 금기가 없는 자연스러운 사랑으로 근친상간을 누렸었는데, 소문에 의해 상상임신이 되자, 지금까지의 사랑이 엄청난 금기였다는 것을 타자의 눈으로 인식하게 되어, 그 금기에 대한 죄책감으로 누나가 자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우진은 근친상간이라는 동일 사태가 오로지 임신으로 인해 ‘순수하고 행복한 사랑→엄청난 절대금기’로 그들 내부에서 전화되었는 바, 그 임신을 유발한 소문, 소문을 퍼뜨린 최초 발설자 오대수가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리를 펴고 있다. 검사 이우진은 말한다. “오대수의 혀가 누나를 임신시켰다!”
그는 마치 사태의 본질이 소문(언어)에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소문이 임신을 유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괴로워했던 본질은 ‘근친상간금기’였지, 임신 자체가 아니었다. 이우진은 “자신의 자식이자, 자신의 조카인 아이를 임신한 소녀의 괴로움” 운운하였지만, 그녀가 정작 누구와 섹스를 했으며, 누구의 아이를 임신했는지는 그들 남매밖에 몰랐다. 소문은 ‘수아가 걸레라며? 아마 임신도 했을 거야!’가 전부이다. 즉 원래 근친상간이 아니었던 것이 소문에 의해 근친상간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 그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데, 남들이 그들을 금기로 단죄하고 돌팔매하여(“우리를 그냥 사랑하게 놔두세요!”) 죽게 만든 것도 아니다. 이우진은 자신과 누나의 괴로움의 핵심이었던 근친상간금기의 책임을 소문, 즉 오대수에게 묻고 있지만, 오대수를 비롯한 상록고등학교의 모든 동창생들은 그들의 본원적 괴로움인 근친상간은 알지도 못했고, 따라서 판단한 바도 없으며, 단죄한 적이 없다. 즉 그들은 이 사태의 외부에 존재할 뿐이다. 소문 이전에 근친상간을 행한 것도 그들 자신이었고, 소문 이후에 근친상간의 금기에 죄의식으로 스스로 괴로워한 것도 그들이었다.
2. 모순을 외부로 돌리고, 깃털에게 덮어씌우다
사태의 본질은 이러하다. 그들은 애초에 금기가 없는 채로 사랑을 했던 것이 아니라, 금기라는 것을 인식하며 사랑하느라 괴로웠다. 이미 금기와 욕망이 공존된 상태로, ‘금기≤욕망’이었는데, 임신으로 근친상간이 외부화될 것이 두려워지자 스스로 금기를 전면화시킨다. 즉 ‘금기>욕망’이 된다. 자신들 내부에서 금기가 욕망을 척살(刺殺)하고, 그들 관계는 자체 붕괴된 것이다. 욕망과 금기의 역동적 모순으로 인한 자체붕괴를 놓고, 그는 전혀 관계없는 외부로 원인을 돌린다. 욕망이 아니라, 소문이 원흉이라는 것이다(‘학교폭력은 폭력영화 때문이다!’). 그는 소문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기소할 수도 있었다. 동창생 모두는 소문 앞에서 균질한 모래알이다. 이우진은 말한다.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이 ‘마찬가지’의 논리는 모두 다 단죄하거나, 모두 다 사면하도록 작동된다. 종교나 근대 사법 체계에서는 대개 사면의 논리로 적용되는 이 논리가 단죄의 논리로 적용되면 테러리즘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는 다수를 대상으로 한 테러리즘을 자행하지는 않는다. 그는 애꿎은 분풀이가 아니라 유죄한 자에게 행하는 ‘정당한 복수’로 가장하기 위하여, 한놈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소문의 속성상 N항째 사람의 죄과(罪科)는 N-1항째 사람에게 귀책된다. 앞 항에 앞 항을 쫓아가다 마침내 N=1항, 즉 오대수에게 이른다.
그런데 사실 소문이 유죄라 할지라도, 오대수는 무죄이다. N≥2항부터는 ‘보지도 않은 것을 본 것처럼 떠든 죄’가 있지만, 오대수만은 직접 본 것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후 그는 현장에서 사라졌으므로 사태에 책임을 질 수도 없었고, 소문이라는 악행에 연루된 바가 가장 적다(현행 형법 제13조에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경우는 벌하지 아니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제15조 1항에 “특별히 중한 죄가 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는 중한 죄로 벌하지 아니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우진은 유죄를 추궁하기 위해 역추적을 감행하다가 마지노선에 봉착하자, 오대수를 기소하고 유죄를 선고한다. 오대수는 소문의 발단이어서 유죄인 것이 아니라, 책임추궁의 마지막 항, 아니 이우진의 바로 앞 항이어서 유죄인 것이다. 즉 그에게조차 죄를 물을 수 없다면, 사태의 책임은 N=0항인 이우진에게 떨어진다. 그는 물론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소문을 정확하게 역추적할 만큼 수사력이 뛰어나고, 수십년에 걸쳐 공소를 유지한 채, 한치의 오차없이 법을 집행할 만치 대단한 행정력을 구비하였지만, 그의 사법능력은 형편없다. 그는 자신의 법을 권력자인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대상화시키는 능력이 없는 유아이자 전제군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타인을 단죄한다. 그는 이 권력적 횡포에 얼토당토않은 모래알론을 갖다대며, 모래알(깃털)인 오대수에게 바위돌(몸통)의 죄를 덮어씌운다. 이는 다름 아닌 죄의 몸통인 이우진, 권력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3. 파시즘의 폭력 앞에서 파시스트가 되다
이우진은 애초 오대수와는 상관도 없는 근친상간을 형벌로 채택하여 집행한다. 그는 자신의 죄인 근친상간을 전가하기 위하여 그에게 ‘모르고 행하도록’ 한 뒤, 사실을 알려준다. 즉 무고한 자에게 같은 죄의 피를 묻히게 한 뒤, 너도 어쩔 수 없는 한패라고 엮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우리는 알면서도 서로 사랑했다.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자신의 근친상간이라는 죄를 ‘사랑과 의지로 금기를 초극한 신적 권능’으로 미화시키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의 고유한 죄를 형벌로 가한 다음, ‘네가 행한 것은 죄이지만, 내가 행한 것은 권능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파시즘의 질문에 오대수 역시 파시스트적으로 화답한다. 오이디푸스가 모르고 지은 죄를 보속(補贖)하기 위해 눈을 찌르는 것과 달리, 그는 죄임을 아는 자신의 기억을 말소하고자 한다. 그는 죄임을 자각하고 비판하는 자아를 지워버리고 파시즘이 심어준 죄를 계속 자행하고자 몰아(沒我)와 맹목(盲目)의 상태를 선택한다. 아비는 스스로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판단할 이성을 반납하고, 죄의 길에 투항한다. 뿐만 아니라 진실을 장악하여 차단하고, 딸에게 그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기회를 빼앗는다. 안티고네가 아비의 ‘죄 씻기의 길’에 동행하는 것과는 반대로, 딸을 계속해서 ‘죄지음의 길’에 동행토록 하는 것이다.
영화는 스타일 만빵의 미학적 쾌감을 선사하는 동시에 진정 괴로운 심정을 안겨준다. 이는 폭력과 근친상간을 소재로 삼거나, 그것을 미화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는 권력과 욕망의 기제가 지극히 파시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교훈은 ‘모르고 지은 죄도 용서하소서’가 아니라, ‘파시즘에 투항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