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낡은 것들은 언젠가 다시 새롭게 다가오게 마련. 이 명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에서 다시 한번 증명된다. 가히 복고적 열기의 향연이라 할 쿠엔틴 타란티노의 액션 대작 제1부는 매우 유쾌하고 영리하게 만들어졌지만, 다소 얄팍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화면 가득 분출돼나오는 숱한 영화들의 이미지와 장면들은 이 모방의 거장과 함께 한 장면 한 장면을 복기해봄이 어떠냐고 어리석은 비평가들을 꼬드기지만, 그들에게 돌아갈 보상은? 글쎄, “타란티노학” 박사 학위?
이 영화의 메타포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의 첫 번째 자막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가장 맛이 있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킬 빌> 속의 연쇄복수극은 한마디로 아이스박스째 쏟아붓는 복수의 대량 공습이라 할 수 있다. 타란티노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검은 옷의 신부>(The Bride Wore Black)에서 빌려온 줄거리 위에 이제껏 봐온 모든 영화들(마카로니 웨스턴으로부터 야쿠자영화,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들에 이르기까지) 속의 자르고 부수는 장면들을 겹겹이 쌓아올린 뒤 무술 연출의 대가 원화평의 스턴트와 1970년대 TV드라마의 정서로 양념을 하고, 여기에 일본 애니메이션이란 소스를 듬뿍 쳐서 초대형 샌드위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타란티노는 여기에다 선혈 낭자한 장면들을 케첩으로 곁들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무지막지한 시체쌓기 놀음의 와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영화의 시작장면이다(다짜고짜 부수고 뭉개면서 시작되는 이 회상장면에서 패서디나의 어느 가정집 거실에서 벌어지는 거친 격투 광경과 창문을 통해 보이는 다섯살 소녀가 귀가하는 모습이 딥포커스로 겹쳐진다). 타란티노의 세계에서 별달리 순수한 동기라 할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겠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 만화적인 캐릭터들을 제외하고는 진짜 결과라 할 만한 것 역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녀 삼총사>류의 설정이라 할 ‘데들리 바이퍼 암살단’의 단원인 우마 서먼(신부 역)은 결혼식 날 자신의 전 애인이자 고용인이었던 빌의 추종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신랑과 하객들이 모두 살해당하고 만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4년을 보낸 그녀. 하지만 너무나 하찮은 모기의 키스가 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벌떡 일으켜세우고,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재미를 봐온 남자 간호사가 그녀의 첫 번째 희생물(혹은, 정화대상이)이 된다. 만약에 영화 <킬 빌> 속에 감춰진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여성을(혹은, 최소한 이 영화의 주인공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몹시 위험하다는 것일 것이다.
다 같이 복수의 화신이지만, 우마 서먼과 타란티노의 전작 <재키 브라운>의 주인공 팸 그리어는 확연히 다르다. 우마 서먼에게는 다만 형벌에 가까운 육체적 위용과 그에 따른 역할만이 ‘적절하게’ 주어질 뿐이다. 물론 타란티노의 ‘적절한’ 도움도 주어진다(그녀가 적들의 머리를 가를 때 타란티노는 ‘적절히’ 화면을 분할해준다). 이제 무대는 일본으로 넘어가고, 우마 서먼은 (그리고 감독은) 왕년 무술 영화계의 아이콘 소니 치바와 한편을 이룬다. 옛 영화 속에서 뛰쳐나온 듯한 이 캐릭터는 그녀가 가공스러운 적 오렌 이시(루시 리우)와 대적하도록 돕는다.
영화 속에 낭자한 핏줄기처럼 유유하게 흘러나오는 ‘유사 동양철학’은 영화 속의 액션을 좀더 윤택하게 만들어주지만, 42쪽에 달하는 방대한 언론홍보 자료에도 불구하고 영화 <킬 빌> 속의 대사는 사막의 코요테와 추격전을 펼치는 만화주인공 로드러너의 그것보다도 많지 않다. 감독이 보여주는 말재주라고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벌이는 장난 정도인데, (말하자면 소피아 ‘파탈’이라든지 장이모를 연상시키는 ‘조니모’ 같은) 그나마 대릴 한나가 연기한 애꾸눈 가짜 간호사 역의 ‘엘렌 드라이버’라는 이름 정도가 잭 커비의 만화 속 인물을 연상시키는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사실 제작자인 하비 웨인스타인이 프리츠 랑이 <니벨룽겐>이나 <벵갈의 호랑이>에서 시도한 것처럼 <킬 빌>을 두편으로 나누어 완성하도록 타란티노에 압력을 가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성장기적 충동과 과장된 사회적 은유의 천재라 할 프리츠 랑은 섣불리 시류를 따르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최고의 작품들은 그 시대의 정신을 영화 속에 담아냈고, 다시 영화를 통해 그 시대의 정신을 표출해냈다. 하지만 자신의 과도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이런 메시지에 연연하기에는 타란티노는 너무나 냉철해 보인다. 바로 이 때문에 매끈하게 뽑아낸 전반부 95분이 박력있다기보다는 맥빠지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직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은 전지전능의 적 빌과 배반당한 신부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치환된 오이디푸스적인 투쟁이 타란티노가 후편에서 기울일 생소한 정신적인 투여를 가늠하게 해주지만(그는 이제껏 이러한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본 적이 없다), 어찌됐건 <킬 빌> 제1부는 반복되는 이미지의 모음이라고 낙인찍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4년 초에 공개될 제2부가 (혹은, 제1부와 결합된 완성된 전체가) 이 시리즈에 필요한 무게감을 채워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