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이 카메라 앞에 선다. 수직으로 라이트가 떨어진다. 선한 눈매와 사람 좋은 웃음이 언덕 너머로 지고 도드라진 광대뼈와 불거진 턱선의 시간이 도래한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인형 같은 미소년들은 잠자리에 들어라. 거친 말투와 원초적 생명력이 지배하는 세상은 이제, 늑대의 시간이다.
정재영은 웃기는 사람이다. 몇번 허를 찌르는 그의 유머에 당하고 나면, 다시 한번 이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 어디 보자. 웃을 때 주름이 자글자글 지는 게 영락없는 삼돌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에서 이렇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본 일이 별로 없다. <킬러들의 수다>의 쿨한 킬러도, <피도 눈물도 없이>의 투견장 ‘독불이’도, <실미도>의 상필도, 물론 기억은 안 나겠지만, <박봉곤 가출사건> <조용한 가족> <공포택시> <간첩 리철진> 등의 조·단역에서도 그는 늘 거칠고, 강하고, 무서운 사내였으니까. “재영아, 너도 상감마마 같은 역할 좀 하지 그러냐.” 집에서는 멀쩡하게 잘생긴 당신의 아들이 욕만 내뱉고, 주먹만 휘두르는 역으로 나오는 게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러나 정재영은 “그게 내 주제죠, 뭐”라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다. “못할 것 같아서 단박에 포기하는 역할이 있고, 못할 것 같은데 욕심나는 역할이 있는 거죠. 낯간지러운 역할은 하라고 해도 못해요.”
<실미도>의 카메라는 오랫동안 어떤 배우에게서 머물지 않는다. 그 안에서의 배우의 연기는 명백한 선이 있다. “전형적인 역할이에요, 머리 싸매고 캐릭터 분석 같은 거 할 필요가 없는. 하지만 그 전형성을 깨는 부분이 바로 유머예요. 상필이는 알고 보면 ‘삐구’죠. 자기보다 센 사람 앞에서는 결국 약자가 되고 마는, 솔직한 역할이에요.” 사실, 시나리오상에서는 도드라졌던 상필과 인찬(설경구)의 갈등이 영화에서는 비교적 축소되었다. “촬영을 앞두고 감독님께서, 시나리오가 이렇게 수정되었다, 고 하시더라구요. 약간 섭섭한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인찬과 상필의 대결이 격렬해질수록 이후 그걸 푸는 것도 쉽지 않단 말이죠. 그랬다면 31명의 실미도 부대원과 기관병들은 겉으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홍보에서 떠드는 ‘그들’은 도대체 어딨어? 했을 거라구요. 결국 적절한 선택이었던 거죠.” <실미도>와 함께 보낸 올해는 “다시는 경험하기 힘든 진귀한 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성기, 허준호, 설경구 같은 쟁쟁한 배우들과 연기란 걸 난생처음하는 신인배우들 사이에서 그는 연기란 게 뭘까 하는 생각을 재정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친구들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무섭게 배역과 영화의 상황에 빠져들어갔다. “나중엔 쳐다만 봐도 이 새끼들 눈빛이 다 설경구야, 클났다, 대충 했다간 끝장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요즘 정재영은 연극 <허탕>부터 영화 <킬러들의 수다>까지 함께한 오랜 친구 장진 감독과, “연기보다는 얼굴 크기를 어떻게 맞출까 고민”이라는 이나영과 함께 <아는 여자> 촬영에 한창이다. “<실미도> 출연한 새끼들이 부러워서 난리”라는 “너무 예쁜” 이나영의 일방적인 짝사랑을 받는 남자 역할이다. 그로서는 가장 부드럽고, 가장 착한 역할인 셈이다. 늑대의 시간은 가고 아침이 밝았다. 이제 이 투박한 얼굴에 맴도는 유유한 미소를, 이 거친 남자의 여린 속내를, 스크린에서 볼 시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