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영화 <매트릭스>는 많은 철학적 영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관련된 책자만 해도 여러 종이 나왔다. 특히, 이 영화가 그리는 매트릭스라는 ‘가상 현실’의 공간은 불교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어, 많은 불자와 스님들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오윤희씨가 쓴 <매트릭스 사이버스페이스 그리고 선>도 불교적 관점에서 영화 <매트릭스>를 살핀 책이다. 지은이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출가해 승려로 살다가 환속해 지금은 미국에서 웹디자이너로 살고 있다. 특이한 이력인데, 그 출가와 환속의 경로에서 얻은 불교 지식과 ‘사이버스페이스’ 관련 지식을 촘촘히 엮어 글을 짜 나간다.
분명한 건 불교의 관점과 <매트릭스>의 관점 사이에 깊은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매트릭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전부 컴퓨터로 조작된 시뮬레이션의 세계라고 설정한다. 똑같이, 대주 혜해 선사는 “수많은 세계에 환상 이외의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설파했다. 매트릭스 안의 사람들이 환영 속에서 살듯, 불교가 보기엔 중생도 환영의 세상을 진짜 세상으로 알고 산다.
영화 속에는 선불교의 선문답을 그대로 따온 듯한 장면이 있다. 선승처럼 머리를 깎고 참선하듯 앉아서 숟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아이를 주인공 네오가 만나는 장면이다. 아이가 말한다.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을 깨달으려고만 하세요.” “무슨 진실” “숟가락은 존재하지 않아요.” “숟가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이가 답한다. “그러면,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이 문답은 6조 혜능의 이야기를 담은 <육조단경>의 한 대목과 매우 닮았다. “그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니,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고,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여 의론이 그치지 않았다. 혜능이 나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지은이는 영화 속 네오와 아이의 문답이 선문답의 유형을 따르고는 있지만, “그 문답은 서술적일 뿐이라서 선문답이 지닌 극적인 맛”, 다시 말해 선적인 맛(선미)이 없다고 말한다. “선에는 무엇보다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 사이에 무언가 격렬한 부딪침이 있어야 한다.” <매트릭스>는 그런 점에서 ‘실패한 영화’다. “값비싼 할리우드식 폭력은 있지만, 정작 필요한 긴장감은 결여됐다. …구구절절 말로써 설명하려고만 든다. 이런 것도 선이라면, 말하자면, 입으로만 하는 구두선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은이가 <매트릭스>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매트릭스>는 여전히 불교의 근본적 이치를 담고 있다. 다만 그 불교적 세계는 <매트릭스>에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영화의 바탕을 이루는 사이버스페이스, 다시 말해 컴퓨터들의 네트워크가 인간의 정신에까지 연결돼 형성되는 가상공간에서 발원한 것이다.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은 부처가 연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인다라(인드라)망이라는 비유와 딱 들어맞는다. 수많은 구슬이 그물처럼 연결된 인다라망에서 그 구슬들은 다른 구슬들의 빛을 받아 영롱한 빛을 낸다. 그러나 그 그물에서 떼어낸 구슬은 아무런 빛도 없는 투명한 물체이다. 오직 다른 구슬과의 관계 속에서 그 구슬들의 빛을 받아서만 제 색깔을 내는 것이다. 구슬은 자아이며, 관계는 인과의 연쇄고리, 곧 연기다. 연기에서 벗어나면 자아란 텅 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제법무아다. 사이버스페이스를 이루는 네트워크는 바로 이 진리를 체험케 해줄 가능성이 있는 가상의 공간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윤희 지음, 호미 펴냄·9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