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인물과 실제 배우를 혼동하는 것만한 바보짓도 없겠지만 배우 정재영(33)을 만나면 우선 약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킬러들의 수다> <피도 눈물도 없이> 등 배우로 뚜렷한 인상을 남긴 영화들에서 선굵고 강한 남성의 역할을 맡으며 쌓아온 ‘센’ 느낌이 여지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설경구, 안성기, 허준호와 나란히 등장하는 <실미도> 포스터를 앞에 놓고는 “이거 봐요. 나만 아주 멀찌감치 서서 찍은 거거든요. 근데 얼굴 크기는 비슷해. 누가 보면 바로 뒤에서 찍었는 줄 알아요.” 킥킥 웃는다.
그동안 각진 얼굴과 날카로운 눈빛이 빚어놓은 팽팽한 인상에 바람이 피식 빠지는 느낌이다. <실미도> 어땠냐고 물으니 “제가 나온 장면 빼고는 좋았는데, 어휴, 식구들이 보면 이번엔 한 술 더 뜨는구나 하겠죠.” 안 그래도 늘 ‘정상’과는 거리가 먼 역할을 주로 해 집안 어른들에게 ”그게 인간이 할 짓이냐”고 핀잔을 받는데 이번에도 한소리 들을 것 같다는 말이다.
“여기 낀 것만 해도 어딘데”라는 흥분으로 합류하게 된 <실미도>에서 그는 주연은 아니지만 가장 역동적인 인물인 상필역을 맡았다. 극중에서는 생략됐지만 상습적인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죽이고 십대에 전과자의 길에 들어선 상필은 인찬에게 맹목적인 경쟁심에 불타다가 그를 이해하고 목숨을 건 탈출에 앞장서게 된다. “상필이는 진짜 싸움꾼도 아니에요. 불에 달군 쇠로 지짐을 당할 때도 “저 새끼가 버티니까” 나도 버틴다는 단순하고 ‘생짜’ 같은 인물이죠. 근데 인찬이한테 사진 보여달라고 했다가 걸려서 사진 찢어지는 장면 있잖아요. 아, 정말 미안하더라구. 괜히 보여달라고 해서 말야.”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해놓고도 그날 밤까지 미안해서 설경구씨의 눈치를 봤다는 그에게는 아직 <실미도>에서의 기억이 오래 남아 있는 듯했다. 실제 실미도의 기억은 모든 이에게 악몽이었지만 강우석이라는 대감독, 안성기, 설경구라는 대배우와 함께한 정재영의 실미도 기억은 새로운 경험과 긴장과 배움으로 가득찬 즐거운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실미도>를 마치고 쉴 틈도 없이 그는 지난달부터 장진 감독의 신작 <아는 여자> 촬영에 들어갔다. 또 얼굴 크기 이야기다. “이나영씨랑 택시를 타고 가는 장면이 있어요. 내가 앞에 앉고 나영씨가 뒤에 앉았는데 찍은 다음 모니터로 보니까 완전히 버스 안이야. 내가 맨 앞 자리에 앉아 있고 나영씨가 맨 뒤에 앉아 있는 것처럼 얼굴 크기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거라.” 전작들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어눌한 야구선수로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처음으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 그가 늘 해왔던 연기로 보자면 “아이, 씨, 왜애” 이렇게 말해야 될 것 같은 상황에 “왜 그러시죠” 순하게 말하는 게 어색하고 민망하기만 하다는 정재영. “너무 이상해서 영화 엎어질지도 모른다”고 엄살을 피우는 그의 변신이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