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여성영화인축제 결산] 여성 프로듀서 5인의 막상막하 토크
2003-12-24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이혜정
“무모하다는 말 듣더라도 가지 않은 길 확장하길”

지난 12월12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2003 여성영화인축제 중엔 흥미로운 포럼이 있었다. 바로 ‘여성 프로듀서 5인의 막상막하 토크’.

명필름 심재명 대표의 진행으로 진행된 이 포럼에는 <살인의 추억>의 김무령, 의 류진옥, <바람난 가족>의 심보경,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유진, <여섯개의 시선>의 이진숙 PD가 참석했다. 67년생에서 69년생까지 동갑이나 한두살 터울인 이들은 비디오가게 주인부터 매니지먼트, 제작부, 홍보 등 각기 다른 성장과정을 거쳐 프로듀서라는 자리에 올랐다.

심재명: 나를 1세대 여성 프로듀서라고 한다면 여기 모인 5명의 프로듀서를 2세대 여성 프로듀서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먼저 ‘나는 어떤 프로듀서다’라고 짧게 자신을 소개해주길 바란다. 가령 체력이 끝내준다든지 ‘암산왕’이라든지 미모로 승부한다든지(웃음)….

이진숙: 부천영화제에서 헤어초크의 촬영감독이자, 프로듀서였던 한 노인이 상영 전에 관객에게 DVD를 파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그렇게 늙어서 힘없을 때까지 영화를 위해 살고 싶은 사람이다.

이유진: 아까 미모라고 소개해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난 그냥 하나만 집중해서 파는 프로듀서인 것 같다. 파다보면 늘 답이 나온다.

심보경: 미모로 승부하고 싶지만 잘 안 되더라. (웃음) 훌륭한 스탭들이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자리에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편이다. 원래는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성격개조도 했고.

류진옥: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늘 이전에 없었던 일들을 해왔던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남이 가지 않은 길을 확대해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김무령: 프로듀서라는 일이 늘 뒤에 있는 직업이라 이렇게 앞에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다. 주변인들이 나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성질이 드럽다’고 한다. 이젠 따로 성질 안 부려도 익히 들어서인지 별 어려움 없이 도와준다. (웃음)

심재명: 김무령 PD 성질 더러운 거는 나와 <결혼이야기> 홍보할 때 알아봤다. 옆에서 한 방송사 연예 오락프로그램 작가랑 통화하는데, 물론 그쪽이 잘못을 했지만, 거의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걸 보면서 참 이 여자 만만찮구나, 하지만 성격은 참 더럽구나 생각했다. 1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런 말을 듣는다면 이젠 김무령 PD의 특징으로 자리잡힌 것 같다. (웃음) 물론 그 성질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거겠지만.

창조적인 면인가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역할인가

심재명: 프로듀서라는 개념은 한국에서 90년대 초반 ‘기획자’라는 말에서 출발했고, 그 사이 한국영화가 산업화되고, 제작 시스템이 성숙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각자 프로듀서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말해보자. 특히 자신이 프로듀싱을 하면서 겪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심보경: 명필름의 제작 매뉴얼에 보면 ‘프로듀서란 창조적이면서 비즈니스적인 이해를 가지고 무장된 이야기꾼이다’라고 되어 있다. 포괄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가장 적합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라는 창조적인 작업에 참여하는 스탭으로서의 크리에이티브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단기간에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매체이기 때문에 예산을 집행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까지 프로듀서의 역할이라고 본다. <바람난 가족>으로 격었던 가장 큰 시행착오는 캐스팅이었다. 초반에 김혜수를 적극적으로 밀었던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무겁기 때문에 좀더 지명도 있으면서 상업적인 이슈가 될 수 있는 배우와 해야겠다는 거였다. 이후 알다시피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수세적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았고 그런 방식으로 보강하려고 했던 것이 실수였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이진숙: 나는 비교적 늦게 영화일을 시작했고, 선배도 없었고, 조직에서 체계적으로 프로듀싱을 배운 적도 없다. 무모함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맞을거다. 그래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충분히 조사하고 사려있게 판단했다면 <뽀삐>나 <여섯개의 시선> 같은 영화는 만들지 못했을 것 같다. 최근 <여섯개의 시선>은 정말 특별한 경우였다. 공무원들과 함께 만든 영화였기 때문에 국가기관으로부터 예산을 정상적으로 타내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국가인권위 찾아가서 왜 돈 안 주냐고 미친년처럼 소리 꽥꽥 지르고 심지어 드러눕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감독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했고 그러다가 거의 영화가 엎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때 6명 중 한명의 감독이 “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철저히 돈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라”는 충고를 했다. 당시에는 왜 내가 국가기관의 편을 드냐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충고대로 했을 때 오히려 일이 편하게 풀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장애들이 여전히 많았다. 예를 들어 납품기한을 안 지킬 시엔 제작비의 몇배를 물어내야 하는 무시무시한 조항도 있었고, 납품을 해야만 제작비의 50%를 받을 수가 있었다. 결국 국가인권위의 담당자가 몇억 개인대출을 받아서 가까스로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권영화를 만드는 데 이런 인권을 유린하는 조항에 사인을 해야 하다니…. (웃음)

이유진: 영화는 1년은 기본이고 보통 2년 이상의 시간이 들어가는 비교적 사이클이 긴 작업이다. 그러다보니 초반의 자기확신을 개봉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중간에 캐스팅도 안 되고, 투자가 어려울 때도 있고…. 그럴 때 초심을 유지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특히 <스캔들…>의 경우 사극이었기 때문에 흥행이 안 된다는 인식이 많아서 투자도 힘들었고, 심지어 계약 직전에 도망가는 배우도 있었다. 끝나고 나니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 하는 시점에서 포기했던 것이 가장 후회로 남는다. 그때 한번 더 노력하고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좀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말이다.

류진옥: 한번도 독립영화를 만든 적도 없었고 한번도 주류영화를 만들지도 못했다. 늘 경계인 같은, 변방의 역할들을 해왔던 것 같다. <…전태일>도 그랬고 장선우 감독의 영화들도 그랬고, 그나마 가 가장 메인스트림의 영화였는데 홀딱 깨져버렸기 때문에 괴롭고, 할말도 없다. 그간은 감독들을 컨트롤하는 역할보다는 어떻게 하면 지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것의 가장 참혹한 결과가 였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프로듀서가 감독을 쥐고 컨트롤하면서 상업적인 부분에 저해되는 요소들은 과감히 잘라내야 하는 사람인가 하는 고민이 많다. 아까 말했듯이 창조적인 면인가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역할인가에 대한 고민인 거다. 내가 장선우 감독의 차기작을 한다고 하면 99%의 반응이 다시 한번 쳐다보는 거다. 저 사람은 도대체 장선우에게서 뭘 기대하고 있는 건가, 혹 당신이 과연 다 망해버린 장선우를 다시 컴백시켜낼 수 있다는 자만과 확신이 있나, 하는 얼굴로…. 글쎄, 장선우 감독과 다시 작업하겠다고 생각한 건 그 안에 있는 재능들을 여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간 컨트롤되지 못해 생겨난 엄청난 누수를 내가 100%는 아니지만 막아내면서, 그의 능력을 조금씩조금씩 회복시킬 거라는, 자만이라기보다는 ‘의지’로서 가고 있는 거다.

단계별, 공정별 기준이 명확히 만들어져야

심재명: 프로듀서는 지켜내고 성취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잡았던 제작기간, 예산, 퀄리티를 지켜내면서 영화가 목표한 바를 성취해나가는 사람. 그런 면에서 프로듀서가 바라본 한국 영화제작 시스템의 문제점, 그리고 각자의 대안을 이야기해보자.

심보경: 현장 프로듀서로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문제는 총제작비의 급상승이다. 마케팅비의 상승도 너무 가파르다. 캐스팅부터 마케팅까지 제작비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단계별, 공정별 기준이 명확히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현재는 배우, 감독, 주요 스탭들이 과다한 개런티를 받기보다 영화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가는 인센티브제도를 계약시에 유도하려 하고 있다.

김무령: 프로듀서의 크레딧에도 문제가 있다. 지금 한국영화의 크레딧에는 제작과 프로듀서가 따로 명시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작은 뭐고, 프로듀서는 또 다른 거란 말인가?

심재명: 영어와 한글의 차이. (웃음)

김무령: 특히 크레딧이 영문 타이틀로 바뀌면서 엉뚱하게 나가는 경우도 많고, 상황따라 변용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하는 역할에 비해서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불안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심재명: 크레딧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제작체계를 갖춰가는 문제인 것 같다. 그나저나 황당하게 번역이 된 적이 있나?

김무령: … 아예 없어진 경우가 있었다.

심재명: 한 시간이 이렇게 짧다. 이제 마지막으로 프로듀서로서 개인적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면 좋겠다.

김무령: 영화를 한 지 오래됐지만 <살인의 추억>으로 여러 가지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어쩐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류진옥: 아까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냥 열심히 하고 싶다.

심재명: 장선우 감독님 거? (웃음)

이진숙: 어린나이에 비디오가게를 시작해서 현금과 가까이 살아왔다. (웃음) 뭔가 재밌는 게 없을까 하는 단순한 기분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요즘은 그 이상의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오랫동안 한 감독과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내가 한때 매스컴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심재명 대표를 보고, 이 사람 운전기사나 해주면서 일을 배워볼까, 했던 것처럼 프로듀서를 꿈꾸는 여성들의 역할모델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다.

심보경: 글쎄… 이제 심재명 대표의 그늘에서 벗어나 훌륭하고 독립적인 프로듀서가 되는 것이 꿈이다.

심재명: … 럴수 럴수 이럴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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