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올드보이>의 구약적 응징론에 대한 심영섭의 신약적 비판론
2003-12-24
글 : 심영섭 (평론가)

초자아와 이드의 혈투를 담은 핏빛 일기

이상하게도 근자 들어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면 김기덕 감독이 떠오른다. <복수는 나의 것>의 마지막을 보면서도 그랬다. 송강호가 가슴에 턱 칼을 맞고 땅에 쓰러지는데, 그 꼴을 그대로 버려두는 감독을 보며, 자동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나쁜 남자>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야… 정말 김기덕 감독은 순진한 감독이구나. 참 어리숙한 감독이구나.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하늘 끝까지 올라갔던 <나쁜 남자>의 크레인 숏 좀 봐. 저게 구원이라는 거지. 그런데 이놈의 영화는 그 구원의 끝자락 하나까지도 손으로 밀어내니, 참 지독하다. 지독해.” 이 잔인한 성주들은 주인공들을 사지절단내는 것을 주특기로 하는데, 그러니까 강간이니 강제매춘이니 그런 걸 다루는 감독이 더 잔인한 것일까 아니면 감금이니 절단이니 그런 걸 다루는 감독이 더 잔인한 것일까?

<올드보이>의 마지막은 상상도 할 수 없이 잔인했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허전했다. 김기덕 감독의 <섬> 같은 영화를 보면 늘 몸이 아파온다. 분노가 거의 승화의 경지까지 이른다. 고통스럽다. 저리다. 그러나 적어도 허전하지는 않다. 나는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에서 최민식과 유지태로 하여금 예정된 운명의 계단을 차근차근 밟게 하여 결국 도미노나 주사위 게임처럼 이 지구상에서 그들 영혼을 스러지게 하는 것을 보며, 또다시 최근에 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김기덕을 떠올렸다. 한 사람은 승천해서 거의 신이 돼가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여전히 땅밑을 기어다니고 있구나. 큰 돌을 짊어지고 뱀처럼, 악어처럼.

그리고 결심했다. ‘쓰자’라고. <씨네21>에서 변성찬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박찬욱 감독은 엄살을 부리는 것 같았다. ‘뭐 자신이 낱낱이 정신분석당한 것 같다나.’ 나도 <올드보이>에 나오는 1인칭 내레이션식으로 나름의 결심을 적어본다. ‘감독을 통째로 복습하는 거야.’ ‘쓴다. 쓴다. 아무튼 쓴다.’ ‘평론가 출신 감독님. 그러니까 아무리 벌레만도 못한 평론가라도 쓸 권리는 있는 거 아닙니까?’

1. 스타일 포화의 이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죽이느냐 살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길 넘는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는 놈을 끈 하나로 버티고 있는 최민식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숏 자체가 햄릿 대사의 한 구절이다. <올드보이>의 첫 장면, 한 인간의 삶이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상황. 이게 바로 <올드보이>의 요점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완벽한 통제를 행사하려는 욕망. 이게 바로 박찬욱 감독에 대한 요점이다. 그런데 이 사나이, 치장도 많다. 일단 15년의 감금 동안 만날 똑같은 것만 먹는 상황인데도 주인공 오대수는 넉살을 부린다. “아이고 옆방 아저씨는 젓가락 한짝으로 밥먹겠구나.” 폭력과 웃음이 손을 잡곤, 희대의 롱테이크 롱숏 장도리 싸움신에, 360도 트래킹으로 오대수의 광기가 빙빙 돌고, 광각렌즈로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적 거리를 벌려놓는다. 싸움신에서는 속도를 변주하고, TV와 주인공의 얼굴을 이중분할해서, 시간의 흐름을 압축한다. 프리즈 프레임 대신 정지동작으로 숏을 시작하는, 그의 전매특허 같은 만화적 스타일도 여전하다. 정신없다. 참 많다. 지난 세월 상담 경험으로, 대개 말이 많은 사람들은 숨기는 게 많았다. 지난 세월 평론가의 경험으로, 대개 스타일이 포화상태에 이른 영화는 더이상 갈 곳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영화는 줄기차게 신과 인간과, 무의식과 의식과, 최면에 근친상간에다, 사설 감금과 시간의 역사와 기억의 이기심과 지독한 사랑과 완전한 잔인함에 대해서 늘어놓는다. 참 많다. 참 구구절절이 많다. 그런데 한 자리에 앉아 영화를 삼세판 내리 보았는데도 왜 이리 내 가슴은 텅 비어 있냐? 대체. 그러니 나도 오대수처럼 박찬욱 감독을 노려보며 이렇게 물어볼밖에. ‘박찬욱. 머리는 차고, 가슴은 비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너는 누구냐?’

2. 인간과 괴물의 경계에서

사실 오대수는 이미 처음부터 갇혀 있다. 그는 이우진에 의해서만 갇혀 있는 게 아니다. 오대수는 경찰서에 갇혀 있고, 그가 발버둥을 치자 이번엔 경찰의 수갑에 그의 손을 ‘가둔다’. 경찰서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옷을 벗으며, ‘내보내줘’라고 소리치는 남자. 단 한순간의 구속도 못 견뎌하는 저 단순한 남자를 감독은 기어이 가둔다. 저번 <복수는 나의 것>이 베인다는 ‘자상’의 이미지로 영화를 꾸려갔다면, 이번 <올드보이>는 끝까지 ‘감금’의 이미지로 영화를 꾸려갈 태세다. 사실 격자형의 벽지조차 모두 비슷한 미로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는 스크린을 그가 벗어날 길이라곤 없어 보인다. 오대수, 신의 어릿광대. 이제 주문이 걸린다. ‘오늘만 대충 수습해서 살자던 이름의 인간아! 오늘도 무사히를 빌어줘야 하는 괴물로 변해라!’ 15년간의 군만두 하나의 메뉴. 그 획일성의 잔인함은 오대수를 괴물로 만든다. 감옥에 갇힌 오대수는 TV를 보며 이렇게 읊조린다. ‘TV는 시계이자 달력이고, 학교이고 집이며 교회이자 친구이며 애인이다.’ 친구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TV는 슬쩍 프랑켄슈타인을 비추고 애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민혜경이 비친다(<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송강호의 노래 애인은 김광석이었다). 갓 앤 몬스터. 같은 나이의 친구인데 두 사나이, 참 많이도 변했다. 정말 오대수는 풀려나서 사람을 만나자마자, 제임스 웨일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처럼 사람들을 신기한 듯 만지고 그의 말을 따라한다. 그는 읊조린다. ‘난 이제 괴물이 돼버렸다. 이 복수가 끝나면 난 오대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후 오대수가 인간으로 돌아가 문어체 말을 쓸 때는 오직 한번, 모든 비밀이 밝혀진 뒤, ‘우리 미도 착하지…’라고 말할 때뿐이다. 이렇게 <달은 해가 꾸는 꿈>의 조폭에서 시작한 박찬욱의 인물 역사는 이제 남과 북의 군인을 거쳐 장애인에서 인간 괴물로 종착역을 달린다(그러니 그의 다음 작품이 뱀파이어류의 반인반수라도 놀라지는 마시라). 남과 북의 경계에서,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경계에서, 인간과 괴물의 경계에서 도덕의 임계선을 향해 달려가는 박찬욱의 인물들. 정상인에서 장애인 그리고 괴물로 퇴행하는 이들을 통해, 홍콩누아르에 경배를 보내던 한 영화광은 역사와 사회를 가로질러 점점 더 원형적인 신화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

3. 잔인한 신, 박찬욱의 재림

일년에 한줄.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의 몸은 날짜를 새겨두는 달력이자, 결심을 새겨넣는 종이이다. 박찬욱의 영화세상에서 몸은 죄의식의 종착지이자 분노의 그릇이다. 사실 박찬욱처럼 몸을 다루는 방식에서 철저히 구약적인 감독이 있을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 <복수는 나의 것>처럼 눈에는 눈 신장에는 신장. 류는 신장을 날치기당하자, 그 날치기한 놈의 신장을 도려낸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자신을 감금한 사설 감금인의 이빨을 몽땅 뽑아버린다. 오대수가 원하자 이우진은 미도의 유방을 만졌던 그놈의 손을 잘라서 선물로 준다. 눈에는 눈, 손에는 손. 이즈음 되면 박찬욱의 영화세상은 몸의 사회 심리학, 기관(organ)의 종교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박찬욱, 그에게 몸은 달력이자 결심이고 무기이며, 고뇌이고, 망상이자, 좌절이다. <올드보이>에서도 주인공들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는 행위를 반복한다. 한마디로 스스로의 목소리 혹 자기 주장을 거세당하고 거세한다는 뜻일 게다. 오대수는 이우진에 의해 입이 막히고, 사설 감금인은 오대수에 의해 입이 막히며, 이우진은 손수건으로 스스로의 입을 막는다. 입. 그리고 이빨. 장도리로 이빨 뽑기로 상징되는 무지막지한 거세의 이미지는, 그의 영화에서 그 어떤 인간성에 대한 체감지수도 0도 이하로 낮춘다. 몸의 해체를 통해, 입의 해체를 통해 그는 인간의 운명을 희롱하고, 혀의 뿌리에 담겨 있는 ‘설’득이니 하는 인간적인 것들은 애당초 발본색원하는 것이다. 결국 괴물을 만들어낸 감독과 인간을 해체해버린 감독이 만나는 지점은 지옥의 너른 앞 마당이다. <복수는…>에서, 폭력적인 소음이 가득한 공장과 낡은 아파트, 흰 시트 대신 회색빛 콘크리트 바닥이 안내하는 짓다만 벌거벗은 시멘트 건물들은 지옥의 이미지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다시 한번 낡은 벽지와 벌거벗은 시멘트에서 안식처를 찾아 헤맨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 그 헐벗은 이미지 속에서 잔인한 신, 박찬욱의 재림은 시작된다.

4. ‘난 누구냐?’ 묻지 못하는 이유

왜 나를 가두었나? 오대수는 절규한다. 그는 끊임없이 감금당한 이유를 찾아 헤맨다. 심지어 이유가 알고 싶어, 코앞의 원수도 죽이지 못한다. 여기서 못 나가도 좋으니 갇힌 이유나 알자는 사나이. 그러나 오대수를 통제하려는 이우진의 잔혹함은 거의 강박에 가깝다. 그의 통제 욕구는 물리적인 힘뿐 아니라 최면이라는 초자연의 힘이나 사이버 세상, 심지어 무의식에까지 뻗쳐 있다. 더 커다란 감옥에서의 삶이 어떠냐는 이우진의 조롱처럼 <올드보이>는 시선에 대한 시선 즉 메타 시선으로 뒤덮여 있는 영화다. 감금된 이를 감시하는 시선, 누나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시선, 방독면을 쓴 사나이가 잠든 두 연인을 내려다보는 시선. <복수는 나의 것>에서 툭툭 개입되던 신의 시선은 이제 <올드보이>에 와서는 어디든 감시의 손길을 늦추지 않는 이우진의 시선으로 확장된다. 자신의 펜트하우스를 한 가득 사진기로 치장한 이우진, 즉 메타 시선을 쥔 그는 편집증에 가까우리만큼 현실에 완벽한 그물을 쳐놓는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박찬욱의 영화가 왜 잔혹해질 수밖에 없는지를, 박찬욱의 영화에 왜 구원의 여성이 부재하는지를. <올드보이>에서 감독은 신이 되려는 인간의 욕망과 괴물이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정신분열에 이른 이미지들을 통해 스스로를 풀어헤친다. 거울을 마주보며 괴물과 인간으로 나누어져 있는 오대수. 신이 되려 하면 할수록 괴물이 되고 싶은 욕망은 거세지고, 괴물이 되려 할수록 신의 손길은 거역할 수 없는 무게로 그를 내리누른다. 즉 <올드보이>의 잔혹함은 결국 대타자의 잔혹함이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올드보이>는 대타자와 괴물의 대결 혹은 상징계와 실재계의 대결 혹은 초자아와 이드의 혈투를 담은 핏빛 일기이다. 오대수는 자신의 무의식적 기억을 떠올리며, 점점 더 깊은 내면으로 여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신이 되려는 욕망과 괴물이 되고 싶은 욕망 사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죄의식의 진동은 거세진다. 그 간극이 얼마나 크면, 심지어 친구에게 무심코 건낸 말 한마디에 15년을 감금당하겠는가.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무엇이든 죄로 변화하고야 마는 이 지독한 죄의식의 자장은 박찬욱의 영화를 늘 징벌 가득한 구약의 유황불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아마도 바로 이 지점에서 김기덕과 박찬욱은 결정적으로 그 궤도를 달리할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세상이 아예 초자아나 대타자 그 자체가 부재한 진공의 야생동물의 천국이라면, 그래서 야생의 본능이, 날것의 욕망이 꿈틀꿈틀 기어다니는 곳이라면, (이곳에서는 여성도 퇴화되어 성기로 남는다. 성기만이 유일한 퇴행의 장소이자 애증과 구원의 대상이 된다) 박찬욱의 세상에서 대타자는 완벽한 신이 되어 어디든 시선을 뻗친다. 인간은 증발되고 어머니의 가슴은 사라지며, 시선만 남는다. 잔여물인 좌절과 분노는 잔혹함이라는 상상계에서 판타지로 분출된다. 사실 모든 박찬욱의 영화는 이것이 가짜라는 판타지의 징표들로 충만하다(라캉이라면 대상 소문자 a가 사라진다고 하겠지). 그래서 오대수는 자꾸 물어본다. ‘넌 누구냐?’라고. 더 중요한 점은 오대수 그가, 혹은 박찬욱 그가 물어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난 누구냐?’라고. 이미 칸트가 도덕적 정언 명령에서 이야기했듯이 주체는 선택을 반복함으로써 초자아의 압력을 극복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박찬욱의 영화세상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반복은 금지되고, 금기는 수렁처럼 몸에 직접 새겨져 있다. 그래서 그 몸을 자르지만, 대타자는 끝끝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하는 ‘주체의 구성’을 막는다. 이 잔혹한 신은 심지어 강제적으로라도 금기의 늪으로 자신의 피조물을 이끈다.

5. 실패가 숙명이라고 믿는 감독

그러므로 박찬욱의 영화 주인공들이 늘 삼인조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치 우리의 원형적 관계가 아버지 어머니 아이(그에게는 아들)라는 삼각관계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남자들은 혹은 아들들은 번번이 실패한다. 보스의 손에서 애인 구출을 실패하고, 누나에게 신장을 줄 수 없고 딸을 구해내지 못한다. 박찬욱 영화가 비극적이라면 이러한 실패가 숙명이라고 운명이라고 믿는 감독이 끊임없이 상징계의 탈출에서 실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비록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똑똑하고 아름다운 소피라는 여성을 내세우거나 <복수는…>에서 혁명의 기운으로 무장한 여전사를 내세워도, 그녀들은 탈출의 출구가 될 수 없다. 남자들은 자살을 하고, 박찬욱은 결코 여자를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어머니에게 손을 내미는 것조차 금지된 오이디푸스 단계에 딱 멈춰버린 이 감독의 영화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남자와 남자들은 증오를 넘어 거의 동성애적 숙명으로 묶여져 있으므로. 누나를 포함한 모든 여자는 성기를 지닌 ‘여자인간’이므로. 게다가 <복수는…>과 <올드보이>에서 왜 여자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똑같이 강물에서 죽어가고 강가에 묻히는가. 자연 속에 무의식 속에 여자를 묻어버리고, 이들 남자들은 어디로 가는가? <올드보이>를 뒤덮는 저 끔찍한 거세의 이미지들. 칼을 가지고 다니며 칼을 다루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무용지물인 여자. 미도는 천사로 상징되고, 야수는 미녀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혀를 건다. 그래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세상에서 여자들은 늘 창녀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세상에서 여자들은 늘 천사다. 그러나 기억하라. 여자들을 그 무릎으로 기억하는 오대수여. 여자들은 다 다른 무릎을 지녔다. 기억하라 손이 더워서 스시를 만들 수 없다고 믿는 감독이여. 여자들의 영혼이 더워, 누구든 포를 뜰 순 없다고 믿는다면, 그건 정말 착각이다.

6. 혀를 자른다고 목소리가 잘려지던가?

그리하여 <올드보이>는 소모되는 스타일과 소모되는 이미지의 늪에서 서서히 침몰해간다. 끊임없이 귀청을 두드리는 시계 소리와 시간의 이미지를 보노라면, 감독은 왕가위가 사랑하는 ‘주관적 시간’이라는 탐구과제를 아직 끝마치지 못했는가 싶다. 이우진이 등장하면서 교차편집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대체 이우진의 펜트하우스에서 군만두 넣어주는 신은 왜 갑자기 들어가는 것일까? 그리고 누가 제발 내게 알려달라. 스웨덴의 에바는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관음증의 대가로 벌을 받는 그 뻔한 설정에다, 결벽증적 인간인 이우진의 펜트하우스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나오는 외관을 그대로 빼다박았다. 소리의 엄습과 단절이라는 사운드의 뛰어난 실험은 이미 <복수는…>에서 감행되었던 것이고, <복수는…>에서 보여주었던 그 찬공기, 무심히 흐르는 오줌과 피 속에 누구의 신장도 거부하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대한민국의 냉기는 다 어디로 갔는가. 그리하여 이제 내게 보이는 것은 스스로의 손으로 신이 되고자 했던 한 감독의 욕망이다. 그러고보면, 박찬욱의 영화는 <복수는…>이라는 B형 영화에서 사설 감금인의 혈액형처럼 AB형 영화가 된 것 같다. 작가도 되어야겠고, 관객도 몰아야겠고, 컬트도 되어야겠고. 이우진은 결국 이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것이 남아 있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이우진은 말한다. “누나하고 난 다 알면서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라고. 너희라고. 왜 우리는 안 되는 거지?

아마도 박찬욱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읽었고, 모든 것을 알며,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소년이 쓴 일기를 읽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정작 태어나서 단 한번도 시스티나 성당 밑에 서 본 적이 없는 소년의 일기 말이다. 단 한번도 그것을 만든 인간 때문에 울어본 적이 없는 소년의 그것 말이다. 이 말에 비위가 거슬린다면 혹은 사실이 아니라면, 다음번엔 꼭, 당신이 성당의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 외에 아는 또 다른 인생과 또 다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헛된 메아리처럼, 텅 빈 공기처럼. ‘혀를 자른다고 목소리가 잘려지던가? 심장을 도려낸다고 사랑이 도려내지던가? 목을 베면서 죽음을 벨 수 있던가?’ 이것이 박찬욱의 구약적 응징론에 대한 나의 신약적 비판론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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