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현상 중의 하나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과거의 재현’이다. 한국영화의 21세기는 그 반복 강박으로 시작되었다(<박하사탕>은 2000년 1월1일에 개봉되었다). 그리고 2003년, 한국영화는 <실미도>를 통해 또 한해를 마무리하려 하고 있다. <박하사탕>에서부터 소환되는 과거는 줄기차게 80년대였다(아마도 <흑수선> 정도가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80년대는 장르와 세대를 가로지르며, 때로는 개인적인 추억/외상의 형식으로, 때로는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외상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귀환했다. 2003년 한국영화에서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과거(외상)를 재현(반복)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살인의 추억>과 <실미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고 하는 외상적 사건을 통해 우리의 80년대를 ‘총체적 무능력’의 시대로 바라보고 있다면, <실미도>는 ‘실미도난동사건’이라는 외상적 사건을 통해 우리의 70년대를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 ‘국가주의의 전횡’의 시대로 그려내고 있다. 전자가 젊은 세대다운 세련된 영화적 화법으로 ‘우울한 80년대’를 그려내고 있다면, 후자는 기성 세대다운 우직한 화법으로 ‘잔인한 70년대’를 그려내고 있다. 다소 미약하기는 하지만, <바람난 가족>의 모티브 중 하나는 역사적 외상의 흔적이었다. <실미도>의 촌스럽고 우직한 화법은, <바람난 가족>의 그 쿨한 화법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유운성은 <바람난 가족>에 대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진단을 내린 바 있다. <바람난 가족>이 동시대의 모럴리티와 가장 적확하게 맞닿는 부분은 바로 50년 만에 발굴된 양민들의 유골문제를 처리 중인 변호사가 젊은 여성과 멋지게 불륜을 만끽하는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그 과감한 발상일 것이다).
신파성, 거부할 수 없는 진정성
영화 <실미도>에 대한 찬반의 엇갈린 평가에는, 일정하게 세대적 감수성의 차이가 개입하고 있는 듯하다. 낡은 세대에 속하는 나로서는, <실미도>의 신파성이 거부할 수 없는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되살아오는 70년대의 ‘시대 정신’을 온몸으로 반복 체험할 수 있었다. 사건이 있었던 70년대 초, 나는 꿈속에서 만화영화 주인공 ‘빠삐’가 되어 ‘김일성 도당’과 맞서 싸우곤 하던 어린 소년이었다. 70년대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는 ‘반공주의’이며, 그 시대의 ‘시대 정신’은 생리화, 체질화된 반공주의(이른바 레드-콤플렉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실미도>가 지니고 있는 영화적 힘은 그 ‘시대의 대기(분위기)’와 정확히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더욱이 단지 감상적인 재현에 머물지 않고, 그 시대에 대한 냉정하고 깊이있는 분석의 시각을 갖추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실미도>는 단순한 재현드라마가 아니다. ‘처음과 끝’은 분명히 밝혀져 있지만, 그 전개 과정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건. <실미도>는 그 사건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개연성 있는 추리와 진심 어린 애정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실미도난동사건’의 가장 미스터리한 부분은, 왜 그들이 최후의 순간에 ‘자폭’을 선택했을까 하는 것이다. 영화 <실미도>의 ‘허구적 드라마’는 그러한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그 허구적 드라마는 바로 이 땅에서 ‘반공주의적 주체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그리고 ‘실미도’라는 고립된 지역에서 있었던 그 반공주의적 주체 형성의 드라마는, 그 당시 남한사회 전체의 정확한 축도이기도 하다.
<실미도>는 무엇보다 이 땅의 반공주의(레드-콤플렉스) 형성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이 땅을 사로잡고 있던 레드-컴플렉스는 두 가지 대립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빨갱이’들에게 피붙이가 희생됐다고 하는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기본축으로 하는 것이지만, ‘빨갱이’로 몰리면 자칫 죽을 수도 있다고 하는 공포와 방어 심리의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실미도>는 빨갱이에게 가족이 희생된 교육대장(안성기)과 월북한 빨갱이 자식인 강인찬(설경구)이라고 하는 두 중심 인물의 대립과 공감의 드라마를 통해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연좌제에 묶여 밑바닥을 전전하던, 그리고 훈련 과정에서 자신의 태생적 전력 때문에 의심받고 견제당하는 처지에 놓인 인찬. 그가 자신의 생명(존재 가치)을 방어하는 유일한 길은, 요구받는 것 이상으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는 길뿐이다. 그의 과잉된 애국심은 철저한 자기 방어인 것이다. 교육대장이 인찬을 선발하고 신뢰했던 이유는 그 점 때문이었다. 인찬은 교육대장(체제)의 ‘호명’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몸을 맡겨 ‘주체화’되는 길을 선택하며, 그리하여 교육대장과 일종의 유사 부자 관계를 맺는다.
반공주의적 주체화 과정이 전적으로 심리적 자발성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특히 31명 전원이 하나가 되는 ‘집단적 주체화 과정’은, 다양한 물리적 폭력과 심리적 조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실미도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야생적 본능으로 기간병들과 ‘기싸움’을 하던 그들은, 단 한발의 총성으로 일시에 무력해진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으로 대신 두들겨맞는 기간병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불안과 심리적 고통을 낳게 되고,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한층 더 자발적이 되어간다. 게다가 집단의 생명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조편성 과정은 한편으로는 조직간의 경쟁 심리를 또 한편으로는 조직과의 일체감을 강화시켜, 그들의 집단적 주체화 과정을 완성시킨다. 더욱이 교육대장(체제)이 그들에게 던진 미끼는 그들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며 생존하는 것만이 일상의 목적이었던 그들에게, 이름없이 죽어갈 날만을 기다려야 했던 그들에게, 체제가 약속한 ‘명예’는 목숨보다 소중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아예 꿈조차 꾸어보지 않았던 대상이 잘 만하면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그 현기증나는 가능성의 유혹 앞에서 그들은 무력해진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육대장(체제)의 ‘호명’에 온몸을 던져 집단적으로 ‘주체화’된다.
영화 <실미도>는 바로 여기에서 그들의 ‘집단 자폭’의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그들이 끝이 빤히 보이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도약하는 것은, 정확히 그들이 꿈꾸었던 ‘이름 회복=주체화’의 좌절에 대응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생리적 욕구(성욕)의 충족조차 포기할 수 있었던 그들(이것은 실제의 사실과는 다른 영화 <실미도>의 허구적 선택이다)이, 일시에 주저와 불안을 떨치고 반란을 꿈꾸는 것은, 그들 중 누군가 ‘명예’ 회복의 꿈을 환기시킬 때이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청와대를 향하던 그들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은, 자신들이 ‘무장공비’로 불리는 순간이다. 그들이 가장 꿈꾸었던 것, 죽음을 결심하면서까지 이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흔적은, 바로 자신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였다. 어쩌면 그들은 자폭의 마지막 순간,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질을 풀어주고 ‘명예’롭게 죽어가면, 세상이 우리에게 ‘이름’을 되돌려줄지도 모른다. 영화 <실미도>는 한편으로 과잉스러운 신파적 감흥으로, 한편으로는 남성유대공간에서의 집단적 마초 심리에 대한 장르적이고 관습적인 묘사로 그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하여 오로지 육체적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그들은 숭고하기까지 한 정신주의적 주체로 확립된다. 하지만 그 신파성과 장르적 관습이야말로, 그들의 ‘자폭’에 대한 유일하고 정당한 해석일 수 있다. <실미도>의 도저한 신파성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실화’를 영화화하는 데 관건이 되는 문제는 ‘사실’과 ‘극적 허구’의 적절한 선택과 조합일 것이다. 영화 <실미도>는, 대체적으로, 사건의 ‘처음과 끝’은 명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에,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은 허구적이고 주관적인 드라마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실과 허구의 선택과 조합에는 일관된 하나의 논리와 굵고 뚝심있는 역사관이 있다. 이 영화는 신파성과 상투성에 대한 자의식을 뛰어넘는 그 뚝심을 통해, 70년대를 사로잡고 있던 ‘시대 정신’의 한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생존을 위해 자발적 ‘복종’을 선택하는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반공주의적 주체화 과정과 그 좌절에 대한 온전한 묘사. 그 주체화 과정의 좌절은 근본적으로 그 ‘허약성=허구성’에서 비롯된다. 그 허약한 주체화는, 상황 변화에 따른 체제의 전략 수정 앞에서, 근본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자폭을 결단하는 순간은, 그 허구성에 대한 깨달음의 순간일 수도 있다. ‘실미도집단난동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전면적으로 군사화되었던 한국사회에서 유일하게 발생했던 ‘집단 반란’ 사건이다. 그러한 엄청난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한 <실미도>의 해석은 명확하다. 체제 내 권력집단간의 암투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유인’된 측면이 있다는 것. 그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과거 청산’을 했던 새로운 권력집단에, 그 사건의 마무리는 신속 정확해야 하지만 결코 최우선 과제조차 될 수 없었다는 것. 그러한 체제의 선택을 통해 그 주체들의 명예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철저히 무시되고 역사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런데, <실미도>가 묘사해내고 있는 이 허구적 주체화의 비극은, 단지 과거 한 시대만의 것일까? 체제가 ‘승공 통일’에서 ‘남북 화해를 통한 평화 통일’로 전략을 수정(?)한 70년대 초 이후에도, 남한사회에서 그 허구적 주체화 드라마는 마치 쉽게 떨칠 수 없는 악몽처럼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아오던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남북경협이 꾸준히 추진되고 있으면서도, 일부 보수세력의 정략적 ‘사상 논쟁’은 아직도 가장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유효하다. ‘용공’이라는 정치적 공격은 아직도 반사적이고 생리적인 방어적 반사 심리를 작동시킨다. 남한사회에서 그 악몽은 그토록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실미도>는 과거의 외상적 순간에 대한 반성적 반복을 통해서 현재의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래서 다시 한번, <실미도>의 신파성과 상투성은, 그 어떤 세련되고 쿨한 과거 재현의 영화보다도, 더 크고 강력한 감동과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흐름을 거스르는 <실미도>의 뚝심은, 한국영화가 반복하고 있는 과거의 재현에 다른 길과 방법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