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잠들지 않는 소란한 유령이기도 하고 복수를 꿈꾸며 떠도는 귀신이기도 하다. ‘정의가 세상을 지배하도록!’ 명령하는 영웅과는 달리, 유령과 귀신이 요구하는 정의는 때로 산 자들에게 불가해하다. 현재의 시간과 불화하기로 작정한 그의 언어는 강박적이고 냉혹하다. 귀환한 역사는 까다로운 시간의 손님이다. ‘자비의 시간을 구하지 말라!’ 역사는 죽은 자의 무덤까지 파헤쳐 망령을 살려낸다. 그리하여 현재는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한다. 산 자와 죽은 자, 아직 죽지 못한 자들의 소요가 역사의 현장이다. <실미도>의 마지막, 중앙정보부의 캐비닛에 ‘실미도 사건 진상 보고서’가 검토되지도 않은 채 다른 서류들과 함께 보관되고, 그 캐비닛이 녹슬어 가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는 그 캐비닛의 문을 열고 서류를 꺼낸다.
와당탕 녹슨 캐비닛은 열었지만 역사의 녹은 녹여내지 못했다<실미도>는 알려진 것처럼 1968년에서 1971년이라는 역사의 시간을 잘라낸다. 그리고 사면을 조건으로 공군의 지휘 아래 30여명의 범법자들을 인천 근처의 섬, 실미도에서 북한 침투와 김일성 살해를 위한 살인기계로 훈련시켰던 실제 일어난 일을 다루었다. 그러나 동시에 필연적으로 영화적 ‘추정’인 <실미도>에 실제란 없다. 현실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 효과 창출에 영화는 80억원을 사용하는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막상 예의 역사가 소환될 때 야기되는 소요와 복합성은, 단순한 드라마로 바꾼다. 영화에서 ‘공공의 적’은 무소불위의 중앙정보부이며, 나머지는 모두 피해자다. 이 나머지에는 공군, 살인기계, 버스에서 볼모로 잡혔던 시민들, 탈영한 군인들에게 성폭행 당하는 여교사 등이 다 포함되어 있다. 아군일 수도 있었던 684부대의 훈련병들과 교관들은 적인 중앙정보부의 번복 결정 때문에 죽고 죽여야 하는 적으로 바뀐다.
이렇게 쉽게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적과 아군이라는 단순구도 대결 안에 몇 개의 논리적이고 역사적인 오류가 발생한다. 우선 이 영화에서 제시하는 중앙정보부로 대변되는 ‘국가’는 당시 군사독재였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은연중 피해자로 분류되는 군부와 분리될 수 없다. 국가라는 장치를 조폭 조직처럼 부장과 행동대장(‘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으로 단순하게 환원시켜 재현하는 이 영화는 조직 폭력배처럼 작동하는 사회 조직에 대한 의도되지 않은 비판일 수는 있지만, 항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 수 없다. 두 번째는 조폭적 상상력에 기대다 보니 관객은 영화를 따라 가다 보면 의리에 감화된다. 그 결과, 남북적십자 회담이나 7·4 남북 공동 성명과 같은 당시 국내 민주화 투쟁에 대한 박정권의 돌파구이긴 했으나 냉전 체제 속에서도 미국 의존적 북한 정책에서 한걸음 벗어난 사건을 684부대의 임무완수를 방해하는 일 정도로 인지하게 한다. 세 번째는 역사기술의 남성 중심적 성격이다. 위에서 말했던 실제란 없고 영화적 추정이며 효과라는 것은, 이 영화가 실미도의 684부대라는 남성 집단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영화적으로 다시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방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함께 영화를 보았던 고정갑희 선생님의 지적처럼 <실미도>의 남성 캐릭터들이 클로즈업과 풀 숏으로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데 비해, 여성들은 성폭행당하며 구석을 차지하고 있거나, 낡은 사진의 어머니로 재현된다.
영화에서 사소한 부분을 왜 문제삼는가, 하는 “통 큰 남자들”의 지적이 돌아오겠지만, 바로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여성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게끔 하는 영화적 역사 기술은 <실미도>만이 아니라 <살인의 추억>, <박하사탕> 등 과거를 다루는 당대영화들의 치명적 역사인식이다. 예컨대 영화 초반부 김신조와 인찬(설경구)의 교차 편집이 684대원들로 이어지는 대신 연좌제의 희생자인 어머니나 군사독재가 낳은 성폭행의 희생자인 여교사의 시각이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면 예의 역사적 유령들의 소란은 훨씬 더 다층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캐비닛은 와당탕 열었지만 역사의 녹, 그 산화물은 충분히 녹여내지 못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