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거만 혹은 자신감, 소심 혹은 겸손함,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
2004-01-14
글 : 박혜명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주인공 역은 권상우에게 딱 맞아 보였다. 비뚜름한 반항기와 단단한 터프함과 상대로 하여금 대꾸할 말을 잃게 하는 거만함은, 권상우의 이미지의 정체이자 그 인간의 정체 같아 보였다.

그러나 세상엔 오해가 많다. 배우들이 떠 안고 사는 오해는 더 많다. 권상우는 자기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몸에 체화되지 않은 사람이다. “이젠 그런 이미지 좀 제발 깨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순하게, 때론 소심하게, ‘가오’보단 실리를 따져가며 천연덕스럽게도 살아왔을 것 같은 인상을 풍겨 준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잘 생긴 얼굴에 싸움도 잘 하고 여자도 잘 다루는 우식 역이 권상우가 으레 할 법한 캐릭터라면, 조용하고 숫기 없고 말주변도 없는 현수 역은 권상우가 공감할 법한 캐릭터다.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웠던 권상우의 일면을 현수가 갖고 있다.

말하자면 권상우의 침묵은 무게가 아니라 얌전함이다. 표정이나 어조에는 자의식이 딸려 있지 않다. 그에 관해 꾸준히 지적되는 문제, 일명 ‘혀짧은 발음’은 권상우의 실제 캐릭터를 훨씬 느슨하게 만들어준다. 큰 키를 주체 못해 구부정하게 앉아 두손을 재킷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저 나사빠진 자세를 보고 연예인다운 무게를 잡는다고 아무도 말 못할 것이다. 빠른 말투는 인터뷰체로 다듬어진 문장을 구사하지 않는다. <동갑내기…>와 <천국의 계단>은 어디까지나 영화였고 드라마였다. 학교에서 교실 맨 뒤에 앉아 제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을 걸어보면 순하고 재미있었을 법한 친구가 권상우다.

이 의외의 이미지는 소박한 꿈으로 이어진다. 권상우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연예계의 대성공으로 연결짓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아버지상에 갖다댄다. 그러나 현재 하는 일에 관해 계획을 세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연예생활의 시작이 된 모델일을 “연기자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딱 1년만 할 생각”이었다는 건 권상우가 머릿속에 적어넣고 다니는 수많은 계획의 한 끝자락이다. 다섯살 차이나는 형이 고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초등학생인 그를 등교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학교에 가도록 형과 같은 시간에 잠을 깨웠다. 그때 생긴 부지런한 습관으로 남들이 열흘짜리 벼락치기를 할 때 “미리부터 안 해놓으면 불안해서” 자신은 20일동안 ‘장기 벼락’을 쳤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열흘 벼락치기한 애보다 성적 안 나올 때 기분 아세요? 그 기분 모르시죠?” 권상우는 자기 머리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열등감이 많은 성격이라 자신이 남들보다 못하는 것을 먼저 의식한다고 했다. 그래서 “현장에 가면 발악을 한다”고 했다. 그 발악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시청률이 40%에 달하게 된 드라마와 개봉 전부터 좋은 입소문이 돌고 있는 영화를 두고 권상우는 “한 마리 토끼는 이제 잡은 것 같고, 나머지 한 마리도 웬만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지나친 겸손과 부담스러운 자신감을 정신없이 오가는 것 같지만 그의 태도에는 어떤 오해의 소지도 없다. 권상우는 어떤 강한 자의식을 내비치기 이전에 마음이 열리는 대로 말을 쏟아놓는, 울타리가 없는 사람이다. 겸손함은 겸손함의 범위를, 자신감은 자신감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우식이 아니라 현수로 방향을 튼 권상우는 이번 영화로 “나한테도 뭔가 있구나, 하는 말을 듣고 싶어요”라는 바람을 또다시 느슨한 태도로부터 흘려내보낸다. 그러다가도 “<동갑내기…>가 500만명이 들었기 때문인지 200만, 300만명은 그냥 평범한 숫자 같다”는 말로 영화사 직원과 기자를 다시 한번 쓰러뜨린다. 그에게 욕심은 있지만 사심은 없다. 그의 이미지를 닮은 마초적 위압감이나 똥폼도 없다. 스타라는 자의식을 챙기지 않는다. 자의식을 챙긴다는 게 어떤 건지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닐까 싶다. 대역없이 소화한 <말죽거리 잔혹사>의 옥상 액션신에서 그가 보여주는 그림같은 발차기에만 반할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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