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인 앙투안 드 백이 최근 <영화사랑>(La cinephilie)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는 여기서 전후영화를 예술장르로 끌어올린 젊은 관객의 모험을, 또는 전세계 영화계에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시선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최초의 영화광들은 엘리트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서, 대중적인 오락영화를 아꼈고 스타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다. 이 시기의 비평은 리타 헤이워드, 킴 노박이나 시드 채리스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아름다움을 꿈에 그리며 찬미했다.
1954년 <포지티프>에 실린, 시드 채리스에 대한 루이 세겡의 평을 보라. “그녀의 길고 늘씬한 다리는 광기어린 사랑을 맞이한 꽃처럼 활짝 벌려져 있다. 채리스는 언제나 환상적인 드레스로 그 다리를 감싼다….” 50년대의 비평가들은 그들의 우상이 가진 관능미가 대단한 만큼 찰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도니스 귀로는 스턴버그의 <상하이 제스처>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 티어니는 아름다운 어깨를 덮는 옷깃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양 옷깃은 내려왔다 들어올려졌다 하면서 어깨를 드러냈다가 숨겼다가 한다.” 영화광은 페티시 도착증 환자이다. 욕구가 충족되려면 그 열광의 대상은 은밀하고 희귀하고 숨겨진 것이어야 한다. 영화에 대한 사랑은 하나의 위반이다.
50년대 시드 채리스의 다리와는 달리, 오늘날 제니퍼 로페즈의 엉덩이는 전세계가 공유한다. 이 엉덩이는 고액의 보험에 들어 있고, 여성지에서 다루어지며, 명품 가방 광고에 등장한다. 어찌 소규모 집단이 자기만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누가 얘기하고 싶어하겠는가? 앙투안 드 백은 영화사랑 ‘시네필리’는 1968년에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본인의 생각에는 70년대, 80년대에 영화광들이 다른 지평을 찾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마카로니 웨스턴, 흑인 대중을 대상으로 한 싸구려 액션영화(blackspoitation), 일본 만화영화, 무협영화, 쿵후영화…. 우리 세대는 <킬 빌>이 기막히게 종합하고 있는 대안적인 영화사랑으로 도피했다.
첫째로 아시아영화들이 우리의 페티시즘을 충족시켜준다. 선배들은 프리츠 랑이나 라울 월시가 중도하차한 서부극을 찾아 미국 영화사와 시네마테크의 자료실을 뒤져댔지만, 신세대 영화광들은 차이나타운이나 인도거리의 비디오가게에서 진주를 찾아낸다. 그들은 고로 아시아와 대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너무 엄청나 안달하게 하는 비밀처럼 그들을 불태우고 있는 정열을 나누고 싶어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열정이 달아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잠자고 있다. 내가 지난달 상하이의 한 진열창에서 마주쳤던 환영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내 젊은 날의 빛나는 중국 아이콘이었던 공리가 적갈색 염색머리를 뽐내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손에는 진공청소기를 들고 있었다. 마분지로 만든 이 처량한 모형이 왜 그렇게 나를 두려움에 몰아넣었는지, 이제는 이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