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무릎에 찬 물, 연기에 고인 광기,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동건
2004-01-26
글 : 심지현 (객원기자)
사진 : 정진환

인터뷰가 있기 전, 두밀령 전투신과 평양 시가지 전투신에 대한 후시녹음을 꼬박 6시간 동안 치러낸 장동건은 목이 쉬어 있었다. 홍보 일정이 빽빽한데, 거친 목소리도 그렇고 얼굴엔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먼저 후시녹음을 끝낸 원빈이 “형, 형도 그랬어? 왜 그렇게 두밀령 고개를 넘는 게 힘들던지, 현장도 아닌 데서 혼자 소리지르려니 쑥스럽기도 하고…”라며 너스레를 떨 듯 위로한다. 2월6일 개봉하는 영화는 현재 녹음과 믹싱, CG와 편집을 마치지 못한 상태다. A 프린트(사운드와 색보정을 거치지 않은 편집본)를 봤는지 원빈은 연신 ‘끝내주는 작품’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그걸 본 장동건의 얼굴에 불안한 기운이 조금 가신다. 이번 영화의 결과를 기다리며 그는 전에 없던 두려움이 엄습한다고 했다.

촬영이 끝나던 날, 일년 만에 집에 돌아와 방에 누웠자니, 내일이면 다시 촬영장에 나가야 할 것 같았단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합천의 여관방도 떠올랐다. 합천에서는 두밀령 전투와 평양 시가지전을 찍었다. 4개월, 그 좁은 방에서 육신의 피로를 청소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하던 날들이 여전히 그의 몸에 습관이라는 형태로 매달려 있다. 촬영 초반에 몰려 있던 전투신 중에 그는 왼쪽 무릎 연골이 파열되는 큰 사고를 겪었다. 찍어야 할 신이 태산보다 큰데, “절대 안정하라”는 의사의 말에 헛헛한 웃음부터 나왔다. “한 일년 촬영하는 동안 체력단련 좀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준비 안 된 배우의 몸은 오히려 부상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는 걸 알았어요. 요령 좋은 배우가 우직한 미련퉁이보다 낫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죠.” 부상을 아는 사람은 감독밖에 없었다. 심지어 원빈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제작 초기부터 투자 곤란을 겪는다는 악성루머가 돌았는데, 배우가 다쳤다는 소식은 괜한 불안감을 조성시킬까 해서였다.

다친 왼쪽 무릎에 체중을 실을 때마다 그는 감이 좋지 않은 걸 느꼈다. 영화를 마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틈만 나면 무릎에 괸 물을 빼고, 스트레칭을 했다. 다친 건 되돌릴 수 없지만, 남은 기간 체력 분배를 해야 하는 건 본인 몫이었다. 그러는 동안 연기력도 벽에 부딪혔다. 좀더 수월한 길을 택하는 게 이번만큼은 허용되지 않았다. “내질러야 하는 연기를 조용히 뇌까릴 수는 없더라고요. 연기에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정면돌파하는 수밖에는. ‘여기는 전쟁터다. 동생을 위해 악인으로 변모하는 형에게서 관객은 광기를 느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죠.” 터지는 폭음 속에서 온종일 악을 쓰다보면 연기의 감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감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영화가 망하면, 감독 다음으로 욕먹을 사람은 나”라는 생각에 어느 때보다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낸 그였다.

장동건은 <태극기를 휘날리며>에 가지고 있던 체력과 연기력, 모든 걸 쏟아부었다. 92년 탤런트로 시작해 12년째의 연기생활이지만, 큰 위기는 없었다. 놀랄 만큼 운도 따랐고, 낙천적인 성격 덕에 슬럼프도 깊지 않았다. 이번 영화는 그동안 모르는 척 눈감았던 연기력에 대한 보고서인 셈이다. 그가 불편한 몸으로 끝까지 강행군을 했던 건 마지막에 찍힐 점수가 궁금한 까닭이다. 이 영화로 한국 영화계에서 그의 입지가 결정될 터다. 레벨 업일까, 다운일까. 그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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