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선댄스영화제 현지 보고
올해 한국영화의 토정비결은 일단 운수대통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단언할 만큼 연초부터 안팎으로 겹경사가 펼쳐지는 분위기이다. 이미 국내에선 <실미도>가 관객 1천만명 시대의 새로운 역사쓰기를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동안 태평양 건너 산골마을에서 날아온 작지만 소중한 기쁜 소식 한 가지 역시 우리를 감격시키기에 충분하다.
지난 1월25일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막을 내린 2004년 영화제 레이스의 출발점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경쟁부문에 출품된 한국 독립영화계의 대부 김동원 감독의 비전향 장기수 다큐멘터리 <송환>이 다큐멘터리 작품 전체를 통틀어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룬 최고의 작품에 수여되는 표현의 자유상(Freedom of Expression Award)을 수상,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선댄스영화제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유난히 복수 수상이 많았던 많큼 논란이 많았던 여타 부문과 달리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들이 시상평에서 <송환>의 수상만큼은 큰 고민과 논란의 여지없이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라고 밝혔듯이 촌스런 쌍팔년도식 표현임을 감수하고라도 쾌거라는 단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상기된 모습으로 무대에 선 김동원 감독의 강도 높은 수상소감이 마이클 무어의 그것 못지않게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이런 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부시가 등장한 이후 한반도에는 다시 긴장상태가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북한이 괴물들만 사는 나라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도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라고 통역없이 직접 소감을 밝히자 객석에선 환호와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김동원 감독, "북한은 괴물의 나라가 아닙니다"
지난 1월15일 개막한 선댄스 영화제는 다큐멘터리의 종주 영화제임을 새삼 강조하는 듯, 이례적으로 서핑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 스테이시 페랄타의 다큐멘터리 로 문을 열며 열흘간의 레이스를 시작했다. 특유의 악명 높은 혹독한 눈보라 대신 기간 내내 따뜻한 날씨로 몇 시간이고 줄서기에 익숙한 선댄스 마니아들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는데, 예상 외의 날씨만큼이나 수상작들의 면면도 대다수 관객과 평단의 예측을 뒤집은 의외의 결과가 속출했다.
우선 극영화 부문 대상을 거머쥔 지능형 스릴러영화 <프라이머>(Primer)는 영화제 내내 주목을 끌지 못하고 숨어 있던 그야말로 복병이었다. 감독·각본 셰인 카루스가 주연까지 겸하고 슈퍼 16mm로 촬영한 이 영화는 미지의 발명품을 만들다 그 기계가 전지전능의 힘을 발휘한다는 새로운 비밀을 알고 난 뒤 혼란에 빠지게 된 네 젊은이의 이야기를 음모이론을 가미한 스릴러 형식으로 그렸는데, 몇해 전 같은 부문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대런 애로노프스키를 스타로 등극시킨 <파이>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 역시 최고의 화제작 <슈퍼 사이즈 미>(Super Size Me)를 제치고, 두 어린 천재 뮤지션들의 우정와 라이벌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7년 동안 쫒아다니며 카메라에 담아낸 뮤직다큐멘터리 <딕!>(Dig!)에 돌아갔다.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에 해당하는 특별상을 수상한 <다운 투 더 본>(Down to the Bone)은 제목대로 뼛속까지 마약에 찌들어버린 어느 저소득층 중년주부의 처절한 중독탈출기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시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독특한 감성의 디지털 화면으로 담아냈는데, 98년 선댄스에서 선보인 단편을 토대로 업그레이드시킨 장편이라는 점과 실제상황이라 믿겨질 정도로 극사실적인 연기를 펼친 발견의 여배우 베라 파미가가 심사위원단의 전폭적 지지를 끌어낸 경우다. 이외에도 촬영상을 수상한 (November)은 <프렌즈>와 <스크림> 시리즈의 커트니 콕스가 주연을 맡아 연기파 배우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였는데, 한 편의점 강도사건의 생존자인(?) 여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세 가지 버전으로 사건의 전모를 보여주는데- 따라서 결론도 세 가지- <오픈 유어 아이즈> <메멘토>에 이어 뫼비우스식 환상스릴러의 계보에 올리기에 모자람이 없을 뿐 아니라 올 영화제 경쟁작 중 가장 창의적인 비주얼과 이야기 구조를 선보였다. 그외에도 올해 극영화 경쟁부문에는 <우즈맨>의 케빈 베이컨, <우린 더이상 여기 살지 않는다>(We don’t Live Here anymore)의 나오미 왓츠- 직접 제작까지 맡음- <가든 스테이트>의 내털리 포트먼 등 내로라 하는 주류 실력파 배우들이 등장했는데, 생각있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변치 않는 독립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새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수상권에선 멀어졌지만 객석의 승자는 따로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상을 수상한 <기품으로 가득 찬 마리아>가 물론 호응을 얻긴 했지만, 기간 내내 거의 센세이션에 가까운 입소문을 탄 영화는 자레드 헤스의 심상찮은 데뷔작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라는 엽기코미디영화. 한국에서도 자취를 감춘 암표 등장사태까지 야기, 무려 100달러까지 치솟더니 심지어는 영화를 본 관객의 주인공 따라하기 유행이 생길 정도였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몇몇 영화들이 있는데, 한마디로 <로얄 테넌바움>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의 맥을 잇는, 아니 재미면에선 훨씬 앞서는 일명 ‘루저(loser)무비’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아이다호 시골마을 고등학교를 무대로 엽기 왕따 삼총사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학생회장 도전기를 뼈대로 마치 한국에서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노 브레인 서바이버>의 주인공들을 모아놓은 듯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유일무이한(?) 슬랩스틱과 썰렁하지만 따뜻한 유머의 퍼레이드는 시종일관 객석을 뒤집어놓았다. 이어 치열한 판권전쟁 끝에 폭스 서치라이트가 전세계 배급권을 전격적으로 따내 내친 김에 시장성까지 검증받았다.
반면, 전통적으로 선댄스가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다큐멘터리 부문은 수상작들을 비롯, 올해 작품수준들이 다소 주춤했다는 것이 중평. 그중에서 그나마 시선을 끈 작품들은 와 <이멜다> 정도. 그나마 관객호응도에선 <슈퍼 사이즈 미>가 단연 압도적 인기를 끌었다. 패스트푸드의 폐해를 고발하기 위해 실제로 지극히 정상적인 건강상태의 감독이 한달 동안 꼬박 맥도널드 음식만 먹고나서 모든 신체기능이 극도로 악화됨을 증명해낸, 사실은 섬뜩하기 그지없는 이 다큐멘터리는 개봉시 업계의 극렬한 반발이 예상되며 당분간은 절대 햄버거를 먹지 않겠다는 결심들이 터져나올 정도로 객석에 충격파를 던지며, 마이클 무어가 그랬듯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대표적 아이콘을 향한 통렬한, 하지만 조금은 부드러운 유머감각이 돋보였다.
새싹들의 잔치 한켠, 프리미어 부문에선 이미 선댄스를 겨울 별장 드나들 듯해온 대가들의 느긋한 내공대결이 한창이었는데, 그 선두타자는 몇해 전 선댄스에서 발굴돼 전세계를 울린 <중앙역>을 만든 남미영화의 황태자 월터 살레스 감독. 이번에는 체 게바라의 남미 오토바이 종단 여정을 담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친정에 돌아왔는데, <아모레스 페로스> <이 투 마마>로 급부상한 라틴 신성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호연과 감독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서정적 로드무비의 정수를 보이며 유니버설 계열 포코스피처스에 무려 500만달러에 판매되는 개가를 올렸다.
아시아에 문을 연 선댄스, 아시아의 맹주로 뜬 한국
30년이 흘러도 여전히 외설논쟁의 원조이자 지존임을 새삼 확인시킨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역작 <몽상가들>은 미국 내에서 무삭제로 NC-17등급 개봉이 확정됨과 더불어 이곳에서도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미국 개봉 초읽기에 들어간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 역시 관객을 흥겨운 사무라이 뮤지컬스탭 속으로 동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반가운 모습과 함께 지난 부천영화제에서 발견된 가이 매딘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도 선보였다.
전통적으로 엽기호러의 산실로 불려온 심야상영 부문에선 <무간도>로 할리우드에도 이름을 날린 유위강 감독의 3D호러 <파크>가 눈에 띄었고, 등이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선 심의파문으로 악명을 떨친 <엑스텐션>이 뒤늦게 선보여 인기를 끌었지만 아쉽게도 왕년의 <블레어윗치> <큐브> 신화를 잇기엔 전체적인 작품수준이 힘에 부치는 편이었던 게 사실이다.
이쯤 되면 최근 미국 독립영화계의 한 흐름을 읽을 수 있는데, 한마디로 지독한 염세주의와 우울함으로 점철된 총체적 불황이 장르를 초월한 거의 모든 작품에 진하게 묻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번 영화제를 특징짓는 가장 커다란 변화는 아시아영화에 대한 파격적인 문호개방이다. 그동안 유럽권의 유수 영화제에 비해 아시아영화에 대한 문턱이 유난히 높았던 선댄스가 올해부터는 작정한 듯 다양한 국적의 아시아권 영화들을 대거 초청한 것이다.
매년 보통 한 작품 정도 진출하기도 바빴던 한국영화들도 올해는 다양한 부문에 걸쳐 가장 많은 작품들이 상영되며 명실공히 아시아영화의 새로운 맹주임을 과시하며 이러한 아시아 영화열풍의 선봉에 자리했다. 기쁜 소식을 안겨준 <송환> 외에도 월드시네마 부문에는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과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이곳에서 미국 진출의 물꼬를 텄다. 또한 프리미어 부문에선 <스카이 블루>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재편집과 영어더빙 공정을 거친 미국판 <원더풀 데이즈>가 상영됐으며, 단편부문에는 노종림 감독의 과 선댄스의 소문난 단골손님인 박진오 감독의 <천천히, 조용히>(Slowly Silently) 등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영화가 초청되고도 미국 독립영화인 집안잔치라는 위세에 주눅들게 마련이었던 아시아 영화인들이 모처럼 기를 편 뿌듯한 한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