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전쟁의 고통과 굴레, <태극기 휘날리며>
2004-02-06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전쟁 소용돌이 형제를 삼키다

99년 전국 597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쉬리>로 ‘한국형 블럭버스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한국영화사를 <쉬리> 이전과 <쉬리> 이후의 시대로 구획지은 강제규 감독은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순제작비만 145억원 이상 쏟아부으며 많은 이들의 기대와 그 못지않은 우려의 시선을 함께 받았던 강제규의 신작 <태극기 휘날리며>가 3일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강 감독은 한국전쟁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우직할 만큼 정공법으로 다루면서도 한 장면 한 장면의 디테일에 놀랄 만한 공을 들여 148분의 상영시간이 지난 뒤 객석으로부터 진심어린 박수를 받았다.

영화는 6ㆍ25 참전용사 유해발굴단의 작업현장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장에서 이진석 하사의 유품이 발견되지만 신원조회 결과 이진석은 77살로 생존중이다. 이진석은 유해가 형 진태의 것일 수도 있다는 기대로 손녀와 함께 현장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카메라는 진석의 손에 놓인 오래된 수제구두에 북적이는 50년 6월 종로거리를 포개며 수많은 가족과 개인의 삶이 파탄난 상처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두를 닦으며 가족을 돌보는 진태(장동건)와 서울대 입시를 준비하는 모범생으로 온가족의 희망인 진석(원빈) 형제는 국수집을 하는 엄마와 엄마를 돕는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은주)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꾸려간다. 그러나 난데없는 전쟁 소식에 이들은 모두 피난길에 오르고, 대구역 앞에서 진석과 진태는 국군 의용군으로 소집돼 전선으로 끌려간다.

영화는 낙동강 전투에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평양 시가전과 중국군 개입 등 한국전쟁의 주요 일지를 따라가며 포연 가득한 전투현장을 잡아낸다. 고막이 터질 듯 전후좌우에서 끊임없이 터지는 포탄과 떨어져 나가는 팔다리, 생존자의 얼굴에 쏟아지는 피와 살점 등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장면은 소름이 끼칠 만큼 빼어난 사실성을 담아낸다.

특히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수만명의 중국군이 달려오는 인해전술 장면은 압도적이라 할 만큼 거대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그러나 카메라는 수천미터 상공에서 진석과 진태의 얼굴 가까이로 옮겨가며 수치와 물량, 체제의 대립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 겨누어진 전쟁의 칼날을 잡아낸다. 진태는 무공을 세워 그 보상으로 동생을 집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전투의 앞줄에 선다. 그러나 전쟁영웅으로 찬사를 받을수록 진태는 전쟁의 광기에 휘말려가고 진석은 미쳐가는 형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구두닦이 시절 함께 다니다가 북한군 의용군에 끌려간 어린 소년, 총 한 자루 없이 허름한 옷차림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꼬마에게 총을 겨누는 진태의 눈빛에는 가족을 보듬으려는 평범한 한 인간의 연민은 지워지고, 증오 가득한 살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진통일을 앞둔 압록강 전투에서 진태는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전쟁은 끝이 보이는 듯하다가 중국군 개입으로 형제의 운명은 다시 한번 비극적인 엇갈림을 맞는다. 그리고 진석은 집에 돌아온다. 그를 기다리는 건 죽음과 실종, 증오와 절망으로 갈갈이 찢겨져 폐허가 된 삶이다.

광기에 휘말리는 형과 아우, 전쟁의 고통과 굴레 잔잔히 다뤄. 낙동강 전투·중국군 인해전술등 빼어난 사실감·스펙터클 ‘압권’

2000년 한국전쟁 유해발굴에 관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50년 만에 발견된 남편의 유해 앞에서 흐느끼던 백발의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강제규 감독은 영화를 통해 놀라운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도 값싼 영웅주의나 상투적인 이념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개인사 속에 새겨진 전쟁의 고통과 굴레를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전쟁터의 아수라장에서 형제간의 미묘한, 때로는 격렬한 갈등을 보여주는 장동건과 원빈의 연기와 공형진, 오영란 등 조연들의 탄탄한 뒷받침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6일 개봉.

“생소한 전쟁극 걱정 많았지만 고집 좀 세웠죠”, 강제규 감독 인터뷰

전쟁사극이 흥행이 검증된 장르가 아닌데 이처럼 대작으로 만들게 된 계기는.

개인적으로 장르와 흥행의 상관관계를 믿지 않는다. 어떤 장르이든 그걸 잘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주변에서 걱정이 있었다. 전쟁영화라서 너무 무거울 것 같기도 하고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도 쉽지 않을 거라는. 내 고집으로 밀고 갔다. 우리 영화가 다른 나라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지점이 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게 이 영화를 탄생시켰다. 개인적으로도 어릴 때부터 전쟁영화를 하고 싶었다.

한국전쟁은 아직도 민감한 소재인 만큼 극화하는데에 여러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실미도>는 역사적인 사실이니까 그 사실을 쫓아가는 거고, 물론 거기에 단점도 있겠지만, 우리는 6·25라는 배경이 있지만 어쨌든 픽션이다. 관객들이 영화에서 전쟁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관심을 가질 것이고, 그걸 어떻게 잘 엮느냐가 큰 부담이었다. 두 형제의 갈등과 감정이 전쟁의 비극과 잘 맞물려가야 하니까. 너무 다큐처럼 해도 안 되고, 너무 허구여도 안 되고.

전쟁 장면의 사실감이 압권이다.

우리에겐 전쟁 장면을 찍을 노하우가 많지 않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필름의 선택부터 많은 테스트를 거쳤다. 폭격에 화면이 흔들리는 느낌을 연출하는 카메라 장비도 우리에겐 없어서 할리우드에서 빌릴까 하다가 자체 개발했다. <진주만> 같은 데서 잘 쓰는 개각도 촬영, 화면에 파편 같은 게 튀는데 그게 다 살아움직이는 것 같게 하는 이 촬영도 이번 영화에 맞게 하려고 연구를 많이 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고민을 많이 해서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총제작비가 170억원으로 한국 영화 사상 최대다. 국내에서 관객이 얼마나 들면 손익분기점이 맞는가.

550만~600만명이면 손익분기점을 맞출 것 같다. 흥행부담 글쎄. 최선을 다했다. 여한이 없다.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제작과 감독을 병행해왔는데 어느게 더 좋은가.

제작도 재밌긴 한데, 체질적으로 감독하는 게 훨씬 재밌는 것 같다. 이번에 명필름과 기업결합한 것도 감독 일에 주력하려고 싶어서이다. <쉬리> 이후에 5년만에 감독했는데, 이런 식으로 작품하다가는 하고 싶은 영화는 많은데 반도 못할 것 같다. 또 명필름과 실질적으로 한 회사 개념이니까 내가 제작에 관여를 덜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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