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승부를 봐야 한다.” 1년 전,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는 의지를 밝히고 각오를 다졌다. 연이은 흥행부진과 CJS 연합 가시화로 이중고에 직면한 상황에서 그는 원점으로 돌아왔다며 가장 잘할 수 있는 영화제작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장은 이내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찬물을 끼얹었다. <지구를 지켜라!>의 저조한 흥행 성적은 싸이더스의 위기를 현실로 체감케 했다. 패색 짙은 9회 말 상황. 하늘은 그러나 스스로 돕는 자에게 무심하지 않았다. 곧이어 개봉한 <살인의 추억>은 2003년 한해를 그에게 온전히 헌사했다. 전국관객 525만5376명(서울 191만2725명)으로 흥행 톱을 차지했고, 연말 각종 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2004년을 맞았다. 연초부터 미뤄왔던 인터뷰에 응한 차승재 대표를 만나기 위해 삼성동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언제나 북적였지만 유독 활기가 넘친다는 인상을 받았던 건 지난해의 영광이 안겨준 후광 덕분일 것이다. 얼마 전 코스닥 등록사인 씨큐리콥의 자회사로 들어가면서 돈 걱정을 덜어냈다는 차승재 대표를 만나 2004년의 비전을 들었다.
-현재 상영 중인 <말죽거리 잔혹사>는 전국관객 300만명을 향하고 있지만 그 속도가 기대보다 다소 더딘 것 아닌가. 첫주 이후에는 박스오피스 1위를 내준 터라 실망이 적지 않을 텐데.
=아니다. 아주 낙관적인 경우로 생각했을 때보다 10% 덜 나오는 정도다. 전국에서 400만명 정도 들 거라 봤었는데 최종 스코어는 거기서 조금 빠지는 선이 될 것 같다.
-<실미도> 때문에 타격을 입은 건 아닌가. 농담이긴 했지만 ‘강우석 감독이 내 앞을 막는다’고도 했잖나.
=그렇게 특정 영화를 입에 올리면 쓰나. 나로선 축하드립니다, 라고밖에 할말 없다. (웃음)
-이번에도 ‘저항선’이 작용했다고 보나. 제작자로서 관객이 저어하는 요소가 있다면 어떤 점이 있을까.
=엔딩쪽이 상업적인 결말을 안 갖고 있는 영화라 보고 나면 시원한 느낌을 주는 건 아니다. 엔딩은 버전이 사실 많았는데. 난 우식(이정진)과 은주(한가인)가 서울 변두리에서 살림 차린 뒤 조그만 구멍가게 열어서 살고 있는데 현수(권상우)가 찾아가서 같이 저녁 먹고 선물로 주기로 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슬쩍 놓고 나오는 버전이 가장 좋았다. 그러면 이야기가 좀더 명확해지는데 감독으로선 정진(우식???)이란 인물을 좀 가리고 싶었던 것 같다.
-얼마 전 보안전문업체 씨큐리콥에 싸이더스 주식 전량을 40억원에 넘겼다. 돈 걱정 안 하고 제작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동안 회사의 재무구조가 썩 편안하지는 않았다. 직원들의 고용 안정성을 보장해줘야 하는데 2년 동안 월급도 인상 못해줬다. 회사를 다시 찾아가지고 오면서 떠안고 넘어온 부채덩어리 때문에 지난해까지 많이 시달리기도 했고. 게다가 앞으로 영화가 계속해서 잘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런 압박감이 상당했다. 거창한 그림이 있거나 새롭게 뭘 해보겠다기보다는 돈으로부터 좀 편안해지고 싶었다.
-제작 자본을 끌어들이는 문제 또한 용이해진 건가.
=그건 가벼워질 리 없다. 다만 회사를 유지하는 데 따르는 불편이 없어진다고 봐야 한다. 난 경영 마인드가 없는 편인데 지금까지 꾸려올 수 있었던 것도 (노)종윤(싸이더스 본부장)이 덕분이고. 일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겠지만, 씨큐리콥은 훨씬 기업화되어 있는 곳이라 앞으로 회사 관리가 좀더 타이트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회사 운영에 있어 숨통이 트였으니 그래도 전보다 제작편수가 늘어나게 되는 것 아닌가.
=의도적으로 늘릴 생각은 없다. 경쟁력 있는 시나리오가 많이 개발되면 1년에 10편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아니면 1편도 못할 수도 있고. 내가 시나리오 내면 다 돈 주는 것도 아니잖나. 시나리오가 시장에서 1차적으로 필터링을 거쳐야 하고, 또 좋은 배우가 붙어야 좋은 자본도 붙는 것이고.
-제작자 입장에서 좋은 자본이 따로 있나.
=난 여태껏 개인 돈 받아서 영화한 적 없다. 그건 철칙이다. 회사하고 회사하고 거래를 하면 내가 좀 깨먹어도 억하심정을 갖진 않는다. 그런데 자연인의 돈을 10억, 20억원 깨먹으면 그 집 아들까지도 날 미워할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다. 저 아저씨가 우리 아빠를 망하게 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할까봐 무섭다.
-최근 명필름과 강제규필름 또한 세신버팔로와 상호주식교환을 통해 우회상장했다. 굵직한 제작사들의 이러한 행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자본시장에 나간 것이고 그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제작사 단위에서 머물지 않고 신규 사업으로 진출해서 외연을 확장하고 싶다고 했을 때 주식시장만큼 편리한 것이 없다. 일례로 제작사가 투자배급까지 하겠다고 나섰을 때 시장이 그동안의 실적 등을 참고해서 ‘그래 가능성 있다’고 판단해주면 되니까. 이건 제작비 조달하고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개별 프로젝트 비용을 주식시장에서 구할 수도 있겠지만 난 영화자본을 조달하는 방식은 영화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게 맞다고 본다. 왜냐하면 150억원짜리 영화를 자기 자본으로 만들어서 망할 경우 버틸 수 있는 회사는 별로 없거든. 주식시장은 영화제작이라기보다는 신규 사업쪽에 대한 필요에 가깝다. 우리가 만약 VOD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해서 기존 영화자본이 밑천을 내주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싸이더스의 신규 사업은 뭔가. 종합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서 다시 거듭나겠다는 건가.
=딱히 지금 뭘 해보겠다는 건 없다. 하지만 뭘 하고 싶을 때 금방 할 수 있는 포텐셜과 위치를 갖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사업영역에 뛰어들기 전에 체력을 일단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술자리 등에서 제작 일선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진담인가.
=아니. 일선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올드해지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올드해진 순간 그만두고 빨리 후배들한테 넘겨줘야 한다는 거고. 일본 영화계 가면 그런 거 많이 느끼는데 노친네들이 다 윗자리 차고 앉아 있다. 한국영화가 힘을 갖게 된 건 젊은 친구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 것 아닌가. 현재는 그때 젊은 친구들이 슬슬 나이를 먹은 상태다. 그래서 군대에서 늙은 상사들이 “내가 베트남전에서 말이야” 하는 것처럼 나도 “이건 이렇게 해야 돼”라고 그럴 수도 있다. 노병(老兵)들만이 가질 수 있는 지혜로움도 있겠지만 완고함 때문에 일이 안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나도 내가 하는 영화들이 티피컬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고.
-차승재표 영화의 한계를 절감한다는 건가.
=차승재표 영화가 뭔가. 그건 나도 잘 모른다. 그렇게 이름 붙인 허문영한테 가서 물어보라. 사실 ‘허문영표’ 글도 있으니까 문제될 건 없지. (웃음) 내가 보기에 장르 규범을 100% 안 따르는 영화를 만든다는 건데. ‘차승재표’ 영화가 있다면 그 자체로 퇴행적 자기복제의 위험은 뒤따른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말한 티피컬해진다는 건 뒤로 물러서는 게 아니라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싶은데 노력해도 잘 안 될 때가 있다는 뜻이다.
-허문영씨의 글(한국영화에 고함 3-차승재란 화두에 대한 근심, <씨네21> 348호)을 봤나. 그 글이 ‘차승재에 고함’은 아니지만 몇몇 표현들에선 동의하지 않을 것 같은데.
=게이머라는 표현은 좀 걸리더라. (웃음)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개척자’라는 평판을 듣기도 했는데. 이제 게이머로 불려서 서운하다는 말인가.
=게이머 하면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해서 아무런 목적없이 쫓아들어가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는데. 그건 아니다. 좀 전해달라. (웃음) ‘차승재가 변했다’라고 비난하면 몰라도.
-그렇다면 현재 갖고 있는 지향은 뭔가.
=정상에 오르는 것 자체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등반으로 비유하자면 이런 거다. 등반에는 미국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원정대를 꾸려 쉬운 코스로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상업 등반도 있다. 어쨌든 오른 거지. 8천m급 고봉 14개를 모두 오른 이만 해도 11명이나 된다.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과거에 비해 큰 의미가 없다. 지금은 새로운 루트를 어떻게 뚫었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이걸 영화로 끌고 들어와서 생각하면 난 체력이 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을 후배들을 위해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롤 모델로서의 욕심 같은 게 있는 거지. 이 경우엔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 영화라는 고봉에 오를 수도 있는 길을 여러 가지 보여주면서 가고 싶은 거다. 요즘 영화가 문학을 대체했다고 하잖나. 사실 킬링타임이 아니라 관객이 사유하게끔 하는 기능을 갖게 된 측면이 있다. 싸이더스가 그 기능의 일부를 떠맡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거창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분명 그런 게 있다. 단,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하기 위해서 싸이더스가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이런 생각만을 밀고 가는 건 위험이 있다. 편협하게 선택하면 안 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 선택의 결과로서 올해 라인업이 궁금하다.
=4월에 개봉하는 <범죄의 재구성>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기꾼 영화가 한번도 없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시나리오 구조가 탄탄한데다 기존 한국영화에 비해서 많이 꼬아져 있고 그런 쪽에서 한 걸음 좀 나아간 게 아닌가 싶다. 한국은행 지점이 실제 털린 적이 있고 거기서 모티브를 따온데다 취재를 많이 해서 실감나는 에피소드도 많아 대중적 반응을 기대한다. 촬영에 들어간 <슈퍼스타 감사용>은 루저들 이야기지만 루저라기보다 뭔가 얻어가는 사람들을 그릴 거다. 휴머니티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촬영 중인 <늑대의 유혹>은 인터넷 소설이다. 일종의 트렌드고, 나도 이런 거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 덤볐다. 다들 못한다고 했거든. 우리가 만들면 완성도가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오만함도 좀 배어 있는 선택이었다. 이런 영화 하면 좀 젊어질 것 같다.
-그래도 다른 제작사에 비해 트렌디한 시나리오는 별로 안 들어올 것 같다.
=맞다. 검토하는 게 20편쯤은 되는데 그런 시나리오는 아무래도 찾기 힘들다. 앞으로 그런 부분은 공동제작 등의 형태로 보충해야겠지.
-<역도산> <남극일기> 등 큰 영화들도 연이어 촬영에 들어간다.
=<역도산>은 송해성 감독, 김형구, 이강산 기사, 그리고 설경구를 제외하곤 일본 배우, 스탭들이 결합하는 형태다. 한국 촬영은 일부 세트 촬영뿐이다. 나머진 모두 일본에서 찍는다. <남극일기>도 송강호가 결합했고 촬영 준비가 거의 다 됐다.
-이 밖에도 해외 연계 프로젝트가 많다. 부담이 없지 않을 텐데.
=사실 우리 회사가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 3분의 1이 해외시장을 염두에 둔 거다. 가시권에 들어 있는 영화는 두편말고도 <조선의 주먹> <무기의 그늘>이 있고. 그리고 6년 동안 8명의 작가가 쓴 <센타우리 라이징>도 최근 펀딩 작업에 들어갔다. 국내시장만 보면 무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넓게 보면 아니다. <화산고>만 해도 일본에서 속편을 합작하자는 제의가 얼마 전에 들어왔다. 전편을 자양분 삼아 전혀 다른 제작 환경에서 속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화 비즈니스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만족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시간 나면 틈틈이, 시간 내서 꾸준히 책을 보는 것 같다.
=1주일에 2권씩 1년에 100권 정도 보는 것 같다. 다른 복잡한 생각 안 하고 몰입할 수 있으니까 좋다. 새로운 길이 보이기도 하고 그러면 충족감도 생기고. 작가의 시각이 뭔지 일별할 수도 있는데 이건 영화하는 입장에서 좋은 학습이다. 반대로 영화 준비하다 보면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다. <유령> 찍은 뒤에 군사 관련 서적 모으는 밀리터리 마니아가 됐다. 군대도 안 갔다 왔는데 화기의 제원을 욀 정도다. 지난해에는 <무기의 그늘> 덕분에 월남사 관련 서적이나 호치민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다. 전엔 잘 몰랐는데 호치민이라는 사람 대단하더라. 혁명가 또는 사상가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보기엔 훌륭한 선비 같은 느낌이었다. 평생 제것 하나 없이 죽을 때도 앉은뱅이 책상 하나 남겼다니까.
-지금 시점에서 싸이더스가 주력하는 목표가 있다면.
=어떤 영화든 잘 만드는 회사가 우리 목표다. 하나만 잘하면 시류에 아무래도 영향받지 않나. 한편 하고 나서 다음 트렌드 주기가 올 때까지 애들 풀어헤칠 수도 없는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