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비평릴레이] <태극기 휘날리며>, 허문영
2004-02-11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순진해보이지만 영리하게, 이 영화에 한국전쟁은 없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후 세대가 만든 첫 전쟁영화답게 이념은 관심 밖이며, 가족애와 형제애가 모든 명분을 압도한다. 순진해 보이지만 한국의 모든 세대, 아마도 해외관객까지 편히 수용할 만한 영리한 설정이다.

구두닦이로 동생을 뒷바라지하는 진태(장동건), 온유하며 총명한 동생 진석(원빈), 진태의 노모와 약혼녀 영신(이은주)은 가난하지만 근면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다. 전쟁이란 악마가 선한 그들을 갈가리 찢는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형제애를 절대선, 전쟁을 절대악으로 양극화하는 극히 친절하며 극히 단순한 대중영화다. 전쟁이란 절대악을 147억의 제작비가 동원된 엄청난 살육의 스펙터클로 전시하며, 그 맞은편에 전장에 끌려나온 두 형제의 미모와 눈물겨운 우애를 배치하는 것이다.

대립하는 선악의 접점에 진태가 있다. 이 영화는 실은 진태의 영웅담이다. 이 영웅은 공동체에 헌신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가족에 헌신하는 멜로의 영웅이며 동시에 전쟁영웅이다. 동생을 제대시키기 위해서라지만 그는 전장에서 누구보다 유능하며 잔혹하다. 그런데 이 영웅은 위험하다. 조국의 승리 따위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동생을 위해 공동체에 봉사했으나, 동생이 아군에 의해 죽었다고 판단하게 되자 그는 적진에 가담해 인민군 영웅이 된다. 그를 결국 되돌리는 건 역시 조국과 상관없는 형제애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가족을 위해 조국을 배반한 인물의 딜레마를 탐구하는 복잡한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혹은 가족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사내의 내면을 응시하는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다시 인민군에게 총부리를 돌리며, 게다가 인민군의 총에 숨진다. 내러티브상으로 속죄하고 징벌까지 당한 이 인물은 영웅의 만신전에 직행한다. 절대선과 절대악의 모호한 경계를 영화는 과감히 떨쳐내며 이 가족영웅을 신화화한다.

단순화를 위해 <태극기 휘날리며>가 버린 건 또 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에서 한국현대사의 맥락을 떼낸다. 여기서 묘사된 한국전쟁은 다른 전쟁을 대입시켜도 내러티브가 거의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추상화한 전쟁이다. 자막과 함께 역사 속의 한국전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묘사되는 건 전쟁의 스펙터클뿐이다. 적의 편을 들었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을 처단하는 것은 전쟁의 일반 행태에 속한다.

전쟁 이전도 이후도 모두 평온하며 안전하다. 전쟁 발발 직전 가족들이 냇가에서 물장구치는 아름다운 밤 장면에서 영신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전쟁이 끝난 뒤 진태의 가족들은 인민군 영웅의 혈육이라는 점 때문에 이른바 ‘연좌제’로 지독한 고난을 겪을 수도 있었다. 영화는 그 세월의 무게를 생략한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다만 휴전중일 뿐이라는 현재의 진실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전쟁은 잘못 찾아온 악마일 뿐이며, 전쟁이 끝나자 악마도 사라졌다. 악마가 앗아간 것들의 부재를 슬퍼하는 일만 남았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말한다. 한국전쟁의 역사성에 관해서라면 24년 전에 나온 임권택의 <짝코>가 훨씬 더 많은 걸 말한다.

전쟁영화의 장르적 테크닉이란 면에서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점은 제한적이다. 이 영화 속에서 전쟁의 참화는 집단 살육의 시간에만 집중된다. <지옥의 묵시록>에서부터 <블랙 호크 다운>에 이르기까지 전쟁영화를 풍부하게 만들었던, 치유불가능한 광기도, 전투 직전의 죽음 같은 고요도, 살육의 들판에서 피어나는 기적 같은 아름다움의 순간도, 인간사를 탈색시키는 육중한 스펙터클의 입체감도 여기엔 없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점차 강도를 높여가며 전쟁의 잔혹한 살육 행각을 나열하는 데 몰두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들을 놓친 게 아니라 보편적 호소력을 위해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비교도 안 되는 비용으로 할리우드 대작에 견줄 만한 전쟁 스펙터클을 창조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험은 텍스트의 모험이 아니라, 저비용 고효율 테크놀로지의 모험이다.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한국전쟁이라는 소재를 탈역사화해 멜로/전쟁 영웅담에 전용한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성취는 거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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