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영토를 경쾌한 스탭으로 넓히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걸어가는 장면을 많이 찍는 이유를 묻자 “러닝타임이 모자랄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이 농담 같은 진실은 ‘역시 기타노 다케시군’ 싶다가도,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극적인 사건은 불친절할 만큼 생략해버리면서, 정작 점프컷이 필요할 땐 지루할 만큼 과잉 친절을 베풀기 때문이다. <그 남자 흉포하다>에서 터벅터벅 백주 대로를 걸어오며 시작된 기타노의 길가기는 이후 자전거와 자동차, 휠체어까지 동원하며 집요하게 반복된다. 이토록 상습적이라면 ‘러닝타임 땜빵용’을 달리 볼 여지도 있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실내보다 실외가 주무대인 그의 영화에선 집을 구경하기 힘들다. 명백한 로드무비인 <기쿠지로의 여름>뿐 아니라 모든 기타노 영화는 로드에서 펼쳐지는 무비다. 그만큼 전통적인 의미로 환원하기도 쉽다. 사는 게 피곤한 야쿠자와 경찰, 서핑 애호가 청소부, 섹스 판타지에 중독된 똘아이, 학교를 겉도는 학생들, 엄마없는 아이와 건달 아저씨 등 기타노의 주인공은 모두 체제의 변두리를 떠도는 아웃사이더다. 그들의 정처없는 여정은 때로 길이 끝나는 바닷가에서 죽음을 맞는다. 가정과 사회에 안착하지 못한 자들이 엄마 같은 바다 곁에서 아이처럼 굴거나 생을 마감하는 건 꽤 자연스럽다. 길은 종종 모험과 성장, 고독과 죽음을 인도하는 생의 (뻔한) 상징으로 ‘읽힌다’.
맹목과 유희의 길가기
<돌스>에 이르러 길가기는 극에 달한다. 붉은 끈으로 묶인 남녀는 걷다가 죽을 것처럼 걷더니 정말로 죽는다. 꿈에서마저 현실의 보폭을 유지할 정도니, 분라쿠의 테마를 옮겨왔다는 사랑의 도피행은 이보다 처절할 수 없다. 한데 문제는 여기부터다. 막연히 사랑의 여로를 은유하는 듯하지만 이들의 길가기는 그만한 필연성을 납득시키지 못한다. 내면을 보이지 않은 채 자행되는 돌연한 행위들은 입을 닫고 눈을 찌르는 등 소통 거부의 방식으로 소통하려는 역설에 빠져 있다. 야쿠자의 손가락 자르기처럼 이 일본식 자기 희생은 감동적이기보다 얼떨떨하다. 그래서인지 극적 맥락보다 길가기 자체를 보여주는 길가기는 사랑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대신 사랑의 맹목성을 직시하게 한다. 방향성 없이 이어지는 눈밭 길가기 숏들은 화면을 종횡무진하는 그 맹목에 다름 아니다. 여자의 종종걸음이 암시하듯 이 길가기는 자동인형의 반복 운동과 같다. 분라쿠 인형같이 무표정한 인물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걷도록 조종된 셈이다. 이런 기계성은 이미 기타노의 폭력이 보여준 바 있다. ‘그 남자’가 흉포한 건 ‘고마해라’ 싶을 만큼 지독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패고 쏘기 때문이다. 컨트롤이 불가능한 듯 불쑥 튀어나오는 그 폭력은 끝내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눌 때까지 지속된다. 그건 감정이라기보다 제어하기 힘든 어떤 맹목이며, 인간을 인형으로 만드는 비인격적인 인형사다. 이를 기계라 부르자면 <돌스>는 세쌍의 사랑이 아니라 폭력- 기계처럼 폭력적인 하나의 사랑- 기계를 보여주는 영화가 된다. 인간은 잠재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런 기계들에 몸을 맡기고 산다.
그렇다고 <돌스>가 미학적 허무주의로 폄하되어 마땅한 건 아니다. 한없이 우울하던 여자는 끈에 걸려 남자가 넘어지자 처음으로 웃는다. 자신을 자동인형으로 만든 끈은 이때 놀이의 도구가 된다. 기타노 영화의 과묵함을 지우는 모든 웃음은 이렇게 피어난다. <자토이치>는 그 정점이다. 쟁기부터 나막신까지 온갖 도구들은 기계적인 반복 운동을 통해 훌륭한 놀이기구이자 예술적 유희의 재료로 둔갑한다. 죽음으로 치닫는 기계에 지배되던 인간이 삶을 욕망하고 만끽하는 기계들을 생산하는 셈이다. 이 생산이 저항은 아니다. 기타노는 죽음을 수락한 상태에서 마음을 비우고 놀 줄 아는 대가다. 러시안 룰렛부터 자토이치의 주사위까지, 그의 유희는 궁극적으로 삶과 죽음의 도박을 깔고 있다. 그건 길가기의 도중에 잠시 앉아서 벌이는 짓거리들이다. 그러니 길가기는 맹목의 기계뿐 아니라 유희의 기계로도 가득하다. 떠돌이 검객의 마을 체류기인 <자토이치>도 길가기의 도중에 벌어지는 유희의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희 역시 개인의 내면과는 무관하다. 유희는 쟁기가 리듬을 낳듯, 사물에 부여된 인간적 용도를 넘어선 사물 자체의 물질성에서 비롯한다. 길가기를 작동시키는 두 가지 기계들은 이처럼 탈인간적인 시선을 열어준다.
‘킬 모던’의 진검승부
<돌스>와 정반대의 오락영화로 환영받고 있지만 <자토이치> 역시 <돌스>의 길가기 형식을 이어받는다. 자토이치의 등퇴장을 앞뒤로 한 그의 활약상은 주 내러티브를 이루지만, 이에 종속됨 없이 젊은 사무라이와 게이샤 자매의 부 내러티브들이 각각의 과거사와 더불어 전개된다. 단연 증가한 건 내러티브와 전혀 무관한 유희들이다. 검술 연습과 노름 연습, 게이샤 공연과 탭댄스 등은 악당에 짓밟힌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라이어티 쇼를 펼친다. 기타노 특유의 시각적 유머는 청각적 유머까지 동반한다. <돌스>가 채도 높은 색깔로 승부한다면, 한껏 채도를 낮춘 <자토이치>는 리듬으로 승부한다. 이 엔터테인먼트는 라스트신에서 정점을 친다. 거의 독립된 공연에 가까운 군무는 극장을 일순간 난타 공연장으로 만든다. 이건 가령 의 마지막 농무가 드라마 속에 버무려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관객은 평화를 되찾은 백성들이 아니라 현실 속의 탭댄스 배우들을 보기 때문이다. 사무라이 장르로 편입되는 대신 온갖 대중문화와 전통문화의 문을 열어젖히는 이런 길가기는 나름의 영화적 성취와 시대적 적실성을 얻는다. 역사와 비장미를 이미지와 사운드의 표면으로 덮어버리지만, <라스트 사무라이>류의 할리우드 스펙터클이나 <사무라이 픽션>식의 MTV 스타일에 기대는 것도 아니다. ‘킬 모던’의 화려한 칼질이었던 <킬 빌>이 상업적 오리엔탈리즘과 영화적 장르 섞기에 골몰하며 스펙터클의 합을 짤 동안, <자토이치>는 어딘가 허전하고 소박하면서도 볼 거 다 보여주며 영화 바깥을 넘나든다. 기타노의 백핸드 단칼 스트로크야말로 어쩌면 ‘킬 모던’의 진검승부다.
의미의 중심을 해체하다>
기타노 필모그래피 속에서 <돌스>와 <자토이치>는 이전의 길가기 미학을 연장하면서도 확장하는 듯하다. 일본 전통가무, 자신의 그림, 야구 따위의 스포츠를 끌어대던 그의 자유로움은 일본영화에 새로운 길을 뻗게 했다. 분라쿠와 탭댄스는 아예 원형 그대로 수용되어 관객의 체험과 영화의 영토를 함께 넓혀준다. 더불어 의미적 차원에서 중심 해체의 경향은 더 심해진다. 해변은 길가기의 교차로나 활극의 무대로 스쳐질 뿐이고, 주인공은 분산되며, 사랑와 권선징악의 전통적인 주제들도 무의미해진다. 대신 인물보다 인물을 부리고 인물이 부리는 기계적인 것들이 영화의 표면에 새롭게 길을 낸다. 같은 맥락에서 붉은 끈이나 장님은 신화적 상징이기보다 반복 가능한 기계적 모티브에 가깝다. 붉은 끈처럼 서핑보드를 앞뒤로 해서 남녀가 걸어가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거의 <돌스>의 전신이다. 장님 모티브는 기타노의 단골 메뉴인데, <모두 하고 있습니까?>에선 훨씬 더 희화화된 <자토이치>를 극중극으로 볼 수 있다. 탭댄스도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시연된 바 있다.
재밌는 건 이 영화들이 모두 야쿠자영화들 사이에 끼어있단 점이다. 기타노는 인생의 피로가 밴 무표정을 짓고 난 다음에는 전혀 엉뚱하게 기분을 푸는 경향이 있다. 그의 스타일 자체가 길가기인 셈이다. 그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정련하는 집짓기 스타일의 장인이 결코 아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타노의 ‘비트’는 <돌스>의 침묵에서 <자토이치>의 축제로 한달음에 내친다. 선글라스와 권총으로 무장한 다음 미련없이 망가지는 연기를 하는 게 예사다. 그 진폭만큼, 그의 영화는 가장 일본적인 것부터 가장 일반적인 것까지 온갖 문화양식들을 유랑한다. 돌이켜보면 아무도 안 하고 있던 전대미문의 코믹패러디극 <모두 하고 있습니까?>는 허접한 쓰레기가 아니라 그 나름의 기타노 영화였다. 작품에 일련번호를 붙이는 이 길가기의 작가에겐 실패작이라 부를 게 없다. <돌스>는 지루한 예술영화가 아니며 <자토이치>는 가벼운 상업영화가 아니다. 모두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이며, 영화의 가능성을 경쾌한 스탭으로 넓혀온 길가기의 영화들이다.
정승훈/ 영화평론가 reptile2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