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건’이 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
<태극기 휘날리며>는 탄생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다. 한편의 영화가 크게 흥행에 성공하면서 ‘사회 현상’이 되는 일을, 우리는 근래의 한국영화 속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해왔다. 그러나 이 영화처럼 개봉과 동시에(어쩌면 그 이전부터) 자신을 하나의 사회문화적 사건으로 당당하게 내세웠던 영화는, 적어도 이제까지의 한국영화에는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개봉과 동시에 감독과 주연배우를 일반 시사주간지에 표지모델로 등장시켰던 한국영화는 없다. 흥행의 결과와 상관없이,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미 하나의 사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단순히 한편의 영화로 마주 대할 수 없다. 이 거대한 현상 앞에서 좁은 의미에서의 ‘영화비평’이란 무력할 뿐이다. 사건이란 언제나 하나의 ‘징후’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좁게는 현 시기 한국영화의, 넓게는 현 시기 한국사회의 징후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탄생은 한국 현대사의 최대 ‘외상’(trauma)인 한국전쟁의 반복적 귀환이면서, 동시에 현 시기 한국영화(자본)의 ‘욕망’을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
형제애/부성애 = 전근대적인 ‘가문’의 논리
<태극기 휘날리며>는 불가사의하게도(또는 의미심장하게도) 땅에 묻혀 있던 ‘유골’(遺骨)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50년간 묻혀 있던 유골이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하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개봉되었던 <바람난 가족>도 50년 묵은 유골의 발굴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똑같은 세월을 땅에 묻혀 있던 그 유골들은 두 영화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바람난 가족>에서의 그것은 이제는 벗어나야 할 과거의 무게이자 짐의 상징이었다. 그것의 발굴은 완치되지 못한 과거 상처의 재발이었다. 영화의 초반부, 남자주인공 영작은 실족하여 유골을 파낸 구덩이에 빠진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데, 그 허둥대는 몸짓은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는 그의 행적이기도 하다. 과거의 외상적 사건의 흔적으로서의 그 유골은, 그냥 땅에 묻혀 있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병든 아버지이기도 했다. ‘한국적’ 가부장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군사적’ 가부장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끈질긴 생명력은 무엇보다 한국전쟁이라는 외상적 사건으로부터 수혈을 받아왔다. 그것은 반세기 가깝도록 유지되어온 군사독재(이른바 ‘한국형 민주주의’)를 밑으로부터 뒷받침해온 ‘풀뿌리’이고 토대였다. 이제 병들어 죽어가는 아버지,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 유골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바람난 가족>의 새로운 ‘바람’은 그 아버지의 임박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가슴 절절한 ‘형제애’(brotherhood, 이것은 6월로 예정되어 있는 이 영화의 일본판 제목이기도 하다)는 그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애절한 형제애에 몇번인가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끝내 그 의미를 이해(납득)할 수가 없어 당혹스러웠었다. 그 형제애는, 동시대 서구인들에게뿐만 아니라 동시대 한국인들에게조차 낯설게 느껴질 만큼 그렇게 지고지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약혼녀 영신(이은주)의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던 진태(장동건)가, 동생 진석(원빈)의 죽음에는 절망 끝에 태극기를 버리고 인공기를 택하게 된다. 형 진태의 동생 진석에 대한 자기희생적인 애정은 곧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그것이다. 사실, 진태가 보여주는 형제애=부성애는 근대적인 ‘가족’의 논리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그의 동생에 대한 애정이 진정 가족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는 남아 있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라도 살아남는 길을 택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전근대적인 ‘가문’의 논리에 더 가깝다.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고자 하는 진태의 태도는, 가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가문의 영광’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당면한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어쩌면 그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될성부른 동생을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가문의 부활과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한다. 어쩌면 바로 여기에 그 불가사의한 ‘유골 시점’의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 순도 높은 형제애(가문 의식)는 오로지 50년 전 유골의 시점으로 볼 때만 그나마 납득할 만한 것이 된다. 여기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첫 번째 ‘영리함’이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꿈틀대던 한국영화(자본)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욕망은, 그 ‘유골’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세계시장을 넘보기 위해서는 스스로 ‘대물’(大物)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대물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성적인 ‘거물신화’(巨物神話)가 필요하다. 한국전쟁(또는 그 끈질긴 후유증)은 그 남성적 거물신화의 마르지 않는 수원지인 셈이다(길게는 <쉬리>에서부터, 짧게는 <실미도>에 이르기까지).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 신화의 완성을 위해 철저하게 ‘여성’을 지워버린다. 어머니는 말을 잊어야 한다. 그 어머니는 “둘 다 소중한 내 자식”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조차 없는 모호한 모성적 주체가 된다. 형 진태는 자신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내가 아닌 너”라고 동생 진석에게 암시한다. 약혼녀는 자신의 ‘정조’를 변명하면서 죽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두 형제의 갈등 폭발의 기폭제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이 영화가 비극적 영웅 서사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희생이기도 하다.
방어적 환상으로서의 영웅 서사
두 영화의 드라마는 모두 ‘일병 구하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의 그것은 단 한명의 생명(단 하나의 가족의 존속)조차 소중히 여기는 체제의 온정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작전에 동원된 병사들은 끊임없이 ‘단 한명을 구하기 위해 8명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회의한다. 하지만 그 회의의 여정은 스필버그식(할리우드식) 휴머니즘을 통해 극복되며, 그 영웅적 희생의 드라마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휘날리는 성조기(미국식 국가주의)’를 통해 감동적으로 추인된다. 그러나 정작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휘날리는 태극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등장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한 가족의 생존(가문의 존속) 따위는 철저히 무시하는 체제로부터 가문의 희망(동생 진석)을 구하고자 한 가부장적 주체가 벌이고 있는 도전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존 본능(사명 의식)은 체제와 이념을 넘나든다(그는 태극기뿐만 아니라 인공기도 흔들어댄다). 여기에 이 영화의 두 번째 ‘영리함’이 있다. 그러나 그 체제에 맞서는 한 주체의 영웅적 정서는 오로지 우리가 과거의 시점(유골의 시점)에 설 때에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거의 시점에 기댄 환상을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것을 형제애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한국전쟁(같은 핏줄, 형제끼리의 전쟁)에 대한 과잉보상으로서의 방어적 환상으로 이해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때늦은, 시대착오적인 환상일 뿐이다.
사실 나는 이 영화가 부추기는 가부장적 정서로의 퇴행이 그다지 염려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절절한 형제애=부성애가 현재의 우리를 조금이라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착오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다. 그 한 순간의 매혹이 현재의 우리의 삶을 위협하거나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정작 내가 이 영화에 대해서 느꼈던 모종의 두려움의 기원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는 한국영화(자본)의 확대재생산의 욕망이다. 그것은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집어삼킬 수 있는 눈 먼 욕망으로 보이기에 두렵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보편적 휴머니즘(형제애)로 포장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한 것이기에 두렵다. 그것은 한국영화의 장래라는 명목으로 일종의 신종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것이기에 두렵다. 반드시 한국영화의 미래가 ‘할리우드’여야만 하는 것일까? 세상에 ‘할리우드’는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족한 것이 아닐까?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 아닐까? <태극기 휘날리며>는 현 시기 한국영화(자본)의 그릇된 욕망의 징후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감동적인 형제애보다는 <바람난 가족>의 그 발칙한 부정의 몸짓에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