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수 1000만과 650만을 넘기고도 여전히 상영중인 두 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보는 일은 과연 진기한 경험이었다. 뒤늦게 극장을 찾은 게으른 관객은 어쩔 수 없이 영화의 안과 밖을 함께 고민하게 된다. 도대체 실미도와 한국전쟁이 지금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토록 많은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영화는 완성도나 미학적 성취 같은 사소한(?) 가치를 홀연 뛰어넘어 연쇄방화나 집단폭동 같은 사회심리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바뀐다. 간단히 말해, 무언가가 있(거나 아니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선 <실미도>. 한 번 정리해보자. 영화의 얼개는 이렇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들이 어딘가 낯선 곳으로 보내진다. 죽도록 고생하지만 곧 새로운 희망과 목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향해 일로매진하는데 돌연 그 목표가 사라지거나 바뀐다. 너무도 억울하여 항의나 해보려다가 결국 엉뚱한 곳에서 죽는다.’ 어딘지 익숙한 이 이야기는 2004년의 한국에선 조급한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변덕에 대한 서사로 읽힌다. 지금의 5, 60대들. 그들은 전쟁통에 태어나, ‘잘 살아보세’를 부르며 ‘조국근대화’에 청춘을 바쳤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세월이 흐르자 희망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아이엠에프라는 것에 뒤통수를 맞았다. 어디 가서 하소연도 제대로 못한 채 직장에서 쫓겨났고 잉여인간이 되었다.
젊은 세대라고 다를 게 없다. 이제 수능은 자격시험에 불과하리라고, 사교육이 필요없는 교육제도를 만들겠다고, 저마다의 특기만 닦고 가꾸면 대학 진학은 문제없으리라는, 그런 호언들을 믿었던 684부대의 수험생들. 웬걸(?) 수능의 난이도는 갈팡질팡, 공교육은 붕괴직전, 학력차별은 그대로다. 아파트는 이제 투기의 수단이 아니고 사용의 대상일 뿐이라는 정부 말에 혹해 90년대 말 집 팔고 태평하게 전세 살던 사람들, 지난해의 부동산 랠리에 망연자실이다. 왜냐고 묻지 마라. 그냥 세상이 바뀐 것이다. 문득 돌아보면 전국이 실미도다. 바이코리아니 뭐니 하며 주식투자를 부추기던 정부와 자본은 개미들이 달려들자 가지고 있던 물량을 대거 풀어 이익을 실현했다. ‘개인투자자야말로 국가 경제의 주인’이라고 부추기던 이들이다. 그러나 주가가 폭락하자 “주식투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책임”이란다. 마늘 심으래서 심었더니 가격 폭락, 소 키우래서 키웠더니 과잉생산. 치킨집 차렸더니 조류독감이다. <실미도는 바로 이 ‘시대착오’라는 저승사자 이야기다.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는 것이다. ‘넌 끝났어! 왜냐구? 시대가 바뀌었거든. 684부대 좋아하시네, 넌 무장공비야!’
형이 가족주의에 맹목적으로 함몰되어 자기를 파괴하는 동안 동생은 끊임없이 동료에 대한 배려, 타자에 대한 관용 같은 근대적 윤리를 환기시킨다. 전쟁터와 같은 절박한 현실에서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해대고 있는 동생에게 형은 분노를 느끼지만 어쩔 수가 없다.
정리하자면 <태극기>는 현재, 21세기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세대적 갈등에 대한 영화적 표현이다. 구세대는 손에 피도 묻혔고 자식 교육과 생존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때로는 나쁜 짓도 했다. 그들은 항변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왜? ‘사랑’하니까. 그런데 자식들은 그걸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다. ‘누가 그렇게 해 달래?’ 영화 속 진석은 이 땅의 자식들을 대신해 묻는다. ‘날 위해 그랬다고는 제발 말하지 마.’ 서로 환장할 노릇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세대와 세대 사이의 이 유구한 오해, 이것이야말로 전쟁물이라는 외피에 가려진 신파적 동력이었다.
영화는 후반부에 동생의 돌연한 참회를 끼워넣으며 세대간의 화해를 중재한다. 영리한 전략이다. 갑자기 위로받아 눈물이 핑 도는 구세대와 말이라도 퍼부어 잠깐 후련해진 신세대는 해골과 노인이 되어 만난다.
‘시대 착오’와 ‘세대 갈등’, 이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두 편의 영화가 왜 그토록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는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핵심은 독재경험이나 분단구조가 아니라 조변석개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였다. 2004년 봄,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마주친 두 불사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