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구로사와 기요시 회고전] 9일부터 개최
2004-03-08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다작하는 거장의 현란한 면모를 보라

구로사와 기요시의 데뷔작 <간다가와 음란전쟁>에서 최근작 <밝은 미래>와 <도플갱어>까지 총 21편 상영

이미 전주영화제에서 회고전을 한 적이 있고, 지난해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도플갱어>가 선정되었고, 개봉도 한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하지만 그것뿐이다. 이미 <큐어> <카이로> <밝은 미래> 등이 수입된 지 오래지만,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개봉 대기 중이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의 감독 중에서도, 누구 못지않게 장르에 정통한 감독이다. 소개는 많이 되었지만, 아직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세계를 전면적으로 훑어볼 수 있는 기회가 온다. 3월9일부터 19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21편이 상영된다. <스위트 홈>과 <카이로>가 빠진 게 아쉽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직 일본에서 DVD로 출시되지 않은 작품들까지도 고스란히 만날 수 있으니까.

11일간 구로사와 기요시의 21편의 영화를 소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돈 많고 시간 널널한 백수가 아니라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열광적인 팬이 아니라면 21편을 섭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몇년씩 고진감래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로망포르노에서 출발하여 공포, 스릴러, 액션코미디 등 제작사가 요구하는 다양한 영화들을 정말 열심히도 만들어왔다. 한해에 4, 5편을 만든 적도 있었고, 요즘에도 2, 3편 정도는 찍는다. 여전히 1년에 4, 5편을 만들고, TV드라마까지 찍는 미이케 다카시에 비하면 적은 수지만, 이렇게 영화를 ‘양산’했던 ‘거장’은 일본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의 전모를 파악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타협하지 않은 대중영화

지난 2월 열렸던 최양일 회고전에서, <언젠가 누군가 죽는다>와 <꽃의 아스카 조직>을 보던 관객에게서 묘한 탄성과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정말로, 냉혹한 하드보일드의 거장 최양일의 작품일까. <언젠가 누군가 죽는다>와 <꽃의 아스카 조직>은 80년대를 풍미했던 카도가와 영화사의 핵심 전략인 아이돌 영화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르는 오락영화였다. 카도가와는 후카사쿠 긴지, 소마이 신지, 최양일 등 역량을 인정받던 감독들을 끌어들여 대작 오락영화나 아이돌 영화를 만들게 했고,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들은 제작사의 요구를 수용한, 그러면서도 작가의 능숙한 연출력이 매끈하게 다듬어낸 오락물이었다. 대세와 유행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여, 지금 보면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는. 그 작품들이 없어도 최양일의 하드보일드와 휴먼코미디에는 그의 모든 세계가 녹아들어가 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최양일이란 감독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당연히 이런 영화들도 봐야 하겠지만(아이돌영화에도 누군가에게는 결코 거부하기 힘든, 특유의 매력이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최양일 이상으로 많은 대중영화를 만들었지만, 쉽게 타협하지는 않았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적 스타일 자체가 대중적이지 않았기에, 메이저의 대작보다는 V시네마를 주로 만들었다. 그것이 오히려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타일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V시네마도 로망포르노처럼, 꽤나 자유로운 매체였기 때문이다. 오로지 V시네마에서 모든 것을 완성한 미이케 다카시는, V시네마는 모든 실험이 가능한 최적의 매체라고 말한다. 문제는 감독의 재능과 도전정신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구로사와 기요시에게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V시네마에서 온갖 스타일을 구사하며 내공을 쌓은 구로사와 기요시는, 97년작인 <큐어>를 통해 작가로서 인정받았다. 그의 작가적인 스타일은 장르영화 속에서, 오래전에 완성되어 있었다. <간다가와 음란전쟁>에서부터 구로사와 기요시 특유의 냉철함과 롱테이크, 일상적인 폭력은 존재하고 있다. 그의 서명이 영화들의 어디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 21편의 다양한 영화 속에 구로사와 기요시만의 체취가 어떻게 녹아들어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이번 회고전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21편의 영화를 다 보는 관객은 참으로 적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관객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21편의 영화를 이번 회고전에서 모두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아주 거친 지도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자신의 취향이나 관심 정도에 따라 구로사와 기요시의 세계를 탐험해볼 수 있는, 지침서라고나 할까. 감히 말한다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는 대체로 기복이 없는 편이다. 미이케 다카시처럼, 때로는 제작사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장 전형적인 오락물 <네 멋대로 해라>조차도, 구로사와 기요시의 실험과 스타일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것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아주 개인적인 취향을 통해서 강추를 한다면, <뱀의 길>과 <네멋대로 해라: 영웅계획>이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보고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회고전에는 없지만 <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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