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하 <홍반장>)은 제목에서부터 스스로의 정체성을 언명한다. 분명 귀에 익은 제목 아닌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짱가 엄청난 기운이. 얏! 틀림없이 틀림없이 생겨난다….’ <우주소년 짱가>의 주제가에서 곧바로 따온 기나긴 제목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숨어 있을 법한, 겉으로는 무척 평범한 이웃이지만 사건만 터지면 곧바로 해결사로 등장하는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을 예고한다. 그러니까 <홍반장>의 주요 축은 홍반장이라는 낯선 영웅의 디테일 묘사, 그리고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에서 시작되어 로맨스라는 놀라운 판타지의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개그 만화적 관점에서 따뜻한 웃음을 유발시킬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홍반장은 보기 드물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섬세하게 그려진다. 그는 만능 재주꾼으로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받지만 정작 자신은 마음 한구석을 꽁꽁 싸매고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소년 같은 남자이며, 제대 뒤 3년 동안 마을을 떠나 있던 공백기의 미스터리어스함으로 더더욱 호기심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홍반장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되도록 삭제한 채, 그저 이 특별한 남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권유한다. 그리고 관객은 논리를 일일이 따지지 않은 채 기분 좋게 그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무엇보다 영화의 두 번째 축, 개그 만화의 감수성을 제대로 포착한 디테일의 승리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작은 상황 하나만으로 캐릭터의 느낌이 충분히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폭과 양아치들이 난립하던 슬랩스틱코미디가 결여하고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캐릭터로부터 웃음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이끌려나와야 한다는 기본을 제대로 지키는 영화인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꾸 자기 주위를 맴돌며 도움을 주는 홍반장의 속을 떠보려는 혜진이 짐짓 시침떼며 물어본다. “너 나 좋아하는구나?” 남자,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짜증나…”라며 한숨을 쉰다. 닭살 돋는 로맨스의 억지 춘향, 우연 남발, 운명 지향주의는 깔끔하게 제거된 채 최대한 현실에 밀착된 대사와 더불어 고고함과 썰렁함을 오가는 남녀주인공의 순정 개그 만화적 감각을 최대한 확장시키는 순간에 비어져 나오는 웃음들은, 웃어야만 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웃으면서도 불쾌감을 떨칠 수 없었던 일련의 영화들과 달리 상쾌한 뒷맛을 남긴다.
여기에서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 <추억은 방울방울>의 정서가 얼핏 끼어든다. 도시 여자와 시골 남자, 환경과 계급과 성격이 너무 다른 두 남녀가 만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끌어안는 과정에 있어, 차가운 도시와 대비되는 시골의 수려한 자연 공간이 ‘여기야말로 사람 사는 곳’이라는 낭만적 판타지를 심어주며 두 남녀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도움을 주는 과정 말이다. 홍반장의 재촉으로 전공 분야도 아닌 산부인과 의사 노릇까지 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은 혜진이 홍반장과 함께 바닷가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는 장면의 지극한 센티멘털리티는, 그만큼 갑작스럽고 당황스럽게 지금까지의 착한 명랑함의 균형을 뒤흔드는 장치이다. 낭만을 최고치로 한껏 끌어올리고 난 뒤 영화는 그 낭만성의 반동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나머지 30여분은 전반부와 달리 약간 맥빠진 느낌의 순정만화로 일관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런 한계와 단점에도 불구하고 강석범 감독의 데뷔작 <홍반장>은 억지스럽지 않은 캐릭터의 탄탄한 구축으로부터 작은 웃음들을 직조해낼 수 있는 산뜻한 코미디영화의 좋은 예로 남을 만하다. 소박하게 휴머니즘의 가치에 찬사를 보내는 이 착한 영화 앞에서 미소짓지 않고는 배겨나기 힘들다.
:: <홍반장>이 발굴한 매력남
‘공구하고 싶은 남자’ 김주혁!
<홍반장>에는 배우들이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엄정화와 김주혁, 간호선 미선 역의 김가연이 영화의 주요 파트를 책임지고 이끌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영화 <홍반장>과 캐릭터 홍반장의 매력을 최대로 살려낸 주인공 김주혁은 발군의 세련된 코미디 감각을 과시한다. 귀신도 울고 갔다는 확실한 배짱밖에 믿을 게 없는 사내 홍반장, 텔레비전 화면에서 막 기어나온 <링>의 귀신이 그 앞에서 훌쩍훌쩍 울며 “잘못했어요...”라고 칭얼거리는 장면에서의 김주혁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TV 드라마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도 어느 정도 선보인 바 있지만) 이 점잖고 차갑게만 보이던 배우의 어디에 이토록 능청맞고 허점투성이의 매력이 숨어있었나 싶게 놀라게 된다. 지금까지 주로 상대 여배우와의 협업을 통해서 ‘커플 파워’를 발휘해왔던 김주혁은 <홍반장>의 타이틀 롤을 연기하며 비로소 확실한 눈도장을 찍는다.
어쩌면 20대 초반까지의 여성들은 왜 혜진이 홍반장에게 매혹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굳이 찾아낸다면 라스트 신의 ‘와인 수십 병’이라는 낭만적인 장치 때문? 그러나 20대 중후반부터 30대에 이르는 미혼 여성들은 모두 하나같이 영화를 보는 내내 ‘홍반장 같은 남자라면...’라고 남몰래 한숨을 내쉴 것이다(그리고 일제히 그를 ‘통장’으로 추대할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김주혁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