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삐딱한 운명론자의 즐거운 도전, <내 남자의 로맨스>의 김상경
2004-03-10
글 : 박혜명
사진 : 이혜정

<살인의 추억> 이후 근 10개월 만에 만난 김상경이 굉장히 밝아 보였다. 얼굴이 너무 좋아졌다고 말을 건넸다. “그래요? 어제도 새벽까지 촬영했는데…. 제가 원래 그런 타입인가봐요. 한참 쉴 때는 사람들이 ‘어이구, 요즘 힘드세요?’ 그러는데 바빠서 만날 잠 못 자고 다닐 땐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 그러고 말이에요.” 그는 기분 좋게 말했지만 사실 빗나간 답변이었다. 막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의 촬영에다가 곧 크랭크인할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가 겹쳐지면서 안 그래도 바쁜 스케줄이 더 두꺼워질 것에 대한 질문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전에 만났을 때도 그는 영화 홍보 스케줄에 한참 바빴다. 질문의 의도는 마음이 평온해 보인다는 뜻이었고, 그는 정말 편안해 보였다. 그와는 썩 어울려 보이지 않는 로맨틱코미디를 선택한 것에 대해 준비된 궁금증이 있었지만, 저 밝은 기운에도 호기심이 일었다.

<생활의 발견>이 발견했고 <살인의 추억>이 신용보증을 서준 김상경은, 드라마를 통해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만큼 어느 순간 아주 달라져버린 배우다. 그는 한 배우의 잠재력에 대한 평가가 영화 한두편만으로 뒤집어질 수 있다는 걸 적확하게 보여줬다. 영화가 배우에게 품격을 더해주고 배우가 영화에 믿음을 심어주는 관계에 속할 또 한명의 배우, 라는 신뢰가 그 주변에 쌓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사람들이 그의 차기작에 궁금증을 키워온 것은 당연했다. 본인도 그것을 아는 듯했다. “예전에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가 나한테 뭐라 그랬었는 줄 알아요? 내가 출연한 영화 두편이 오히려 나한테 독이 될 수도 있대요. 이른바 아트영화의 최고와 상업영화의 최고를 해봤기 때문에 다른 영화들은 웬만해선 눈에 안 들어올 거다. 더 고민하게 될 거고, 그럴수록 선택하는 것도 더 힘들어질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그거 다 내가 선택한 거 아니거든요?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에요. 내 운명이 그렇게 된 거지. 사람들은 나한테 ‘와, 김상경 시나리오 보는 안목 대단하다’ 그러는데 난 그냥 영화가 하고 싶었고 연기가 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 영화들이 운명적으로 나한테 와준 거죠.”

모든 것을 운명에 돌리는 이 허탈한 논리에 의해, 김상경에겐 <내 남자의 로맨스>도 자기 운명이 됐을 뿐이다. 그는, 7년간 사귄 남자친구를 미모의 여배우(오승연)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여자 현주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속에서 김정은이 연기할 현주의 ‘내 남자’ 소훈 역을 맡을 예정이다. 철딱서니 없는 사고뭉치 여자친구를 따뜻하게 감싸줄 남자. 배우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리없이 흘러갈 영화 같다. 현미경이 들이대어진 ‘실없는 애정의 여정’이나 거친 턱수염처럼 단순 매끄럽지 않은 인간의 심리 같은, 맵고 자극적인 도전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은 영화란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맨송맨송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따뜻하고 기분이 좋더라구요. 난 시나리오를 읽으면 내가 감동을 받아야 하거든요? 이번 시나리오는 두번 정도 읽었는데 두번 다 똑같은 데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사실 이 영화는 현주라는 여자가 중심이고 남자는 서포트하는 입장이에요. 머리로 계산한다면 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게 뭐냐면 내가 선택한다고 다 성공하는 게 아니더라구요. 사실 영화한다고 모인 사람들이 다 잘해보자고 모인 거지, 야, 우리 이번에 한번 제대로 망해보자, 응? 아주 싹 망해보자. 그냥, 아낌없이 망해보자!… 이러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어요. 안 그래요? 그렇다고 했을 때 내가 운명론자이면서도 운명의 장난을 가급적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걸 선택해서 하는 거예요.”

<살인의 추억> 이후 뭘 했냐고 물으니까 딱 두 마디를 들려준다. “산에 좀 다녔구요. 집에 있는 책 읽으면서 지냈어요.” 쉬는 동안 <내 남자의 로맨스>를 연출할 박제현 감독한테 전화를 두번 했는데 한번은 지리산에서, 한번은 계룡산에서라고 했다. 아까부터 운명론자 운운하던 게 이 고상한 취미 때문이었나 싶을 즈음, 을 (운명적으로!) 선택한 이유에서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지금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요.” 순간 잘못 알아들었나 했다. “도올 김용옥 선생 강의 보세요? 그런 것 좀 보고 그러세요. 사실 그 사람이 하는 얘긴 만날 똑같은데, 그 사람이 (완벽한 성대모사로) ‘요즘 정치가 말이야, 개판이야, 개판!’ 이러면 사람들이 전부 뭐라는 줄 알아요? 박수치면서 옳소! 옳소! 그런다니까요? 지금 국민정서가 그렇단 말예요.”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기사 아저씨가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하면서 “세상에, 욕을 장난 아니게 하는데, 그걸 듣고 있으니까 요즘 사람들이 이렇게 분노가 극에 달해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말한다. 그걸 해소해보고 싶다는 게 김상경의 이유였다. “내가 <살인의 추억> 할 때, 메이저리거들에 대한 거부감을 많이 느꼈어요. 기분 나쁜 행태를 하도 많이 봐서…. 요즘도 계속 느껴요. 기득권의 느끼함이라는 게 영화판에도 똑같이 있더라구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요, 내가 뭐 이 영화가 작고 따뜻해서 좋았어요, 그러긴 했지만 진짜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 영화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진짜 반대 많이 했거든요. 너 미쳤다. 그걸 왜 하냐. 정은이가 지금까지 해오던 영화랑 똑같은 건데. 너무 상투적이다. 이러면서 걱정 많이 했어요. 근데 우선 정은이가 자신의 그런 이미지를 바꾸려는 의지가 강해요. 자기도 알거든요. 상투적으로 보이는 거. 그래서 그 말에도 굉장히 민감해하고 있고, 꼭 바꾸고 싶다고 다짐을 한 상태예요. 정은이가 그러더라구요. 자기가 이번엔 정말 달라지고 싶으니까 감독님이랑 오빠도 도와달라고. 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로맨스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영화가 좋은 선례가 됐음 좋겠어요. 그런 구분조차도 좀 우습긴 하지만 마이너리거로서….” 그러고보니 인터뷰 내내 그는 작품성, 완성도 같은 단어를 한번도 쓰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은 기사에 쓰시면 안 돼요” 라며 꼬인 심성을 감추지 않던 김상경은 “약발 떨어지면 바로 내치는 이곳에서 육십, 칠십까지 연기를 계속 하기 위해” 자기 영화가 잘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삐딱한 태도로 마음껏 마이너리거를 자처하는 그의 얼굴이 그래서 편해 보인 걸까. 그렇다면, 전작 두편이 자신의 선택이 아닌 운명의 선택이었다는 말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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