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혜택을 받은, 그러나 희망은 없는 이 나라에서 나는 아이들과 함께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어느샌가 나도 늙었다. 지금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인생을 건 마지막 싸움에 도전하려 하고 있다. 이 싸움에서 생애를 마감하게 될지라도 내게는 한점 후회도 없다.”(故 후카사쿠 긴지)
2002년 가을, 흥성스러워야 할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충격적인 고백으로 좌중을 숙연하게 했다. 골수암을 앓고 있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를 만들리라는 다짐이었다. 그는 결국 <배틀로얄2: 레퀴엠>의 크랭크인 직후 쓰러졌다. 이 영화에서 그가 직접 연출한 장면은 단 하나. 기타노 선생의 딸 시오리가 죽은 아버지가 남긴 그림을 들여다보는 장면이었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신이 됐다. 생전에 정적인 걸 참 싫어하셨는데, 그 조용하고 정적인 장면 하나를 남기고 떠나셨다.” <배틀로얄>의 작가 겸 프로듀서였던 장남 후카사쿠 겐타는 아버지의 마지막 영화로 데뷔해야 하는 얄궂은 운명을 받아들였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자신을 넘어설 수 없을 거라던 아버지의 예언대로, 서른이 되던 해, 그는 아버지를 잃고, 영화감독이 되었다.
아들 후카사쿠 겐타의 ‘사부곡’(思父曲)인 동시에, 아버지 후카사쿠 긴지에게 바치는 ‘레퀴엠’인 <배틀로얄2: 레퀴엠>은 이렇듯 영화 외적인 이유로도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3년 만에 내놓은 속편은 지난해 여름 완성돼 일본에선 이미 개봉됐지만, 오는 4월 한국 개봉을 앞두고 일본 현지 특별시사회를 통해 일부 언론에 먼저 선을 보였다. 긴자에 위치한 도에이영화사가 그 만남을 주선했다.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인생 50년을 동반한 그곳에서 그의 유작이자 그 아들의 데뷔작인 <배틀로얄2: 레퀴엠>을 보게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 도심의 마천루가 우르르 무너져내리는 뜻밖의 오프닝이 펼쳐졌다.
3년 전 배틀로얄(이하 BR)에서 살아남은 나나하라 슈야는 반 BR조직 ‘와일드 세븐’의 리더로 활동하며 조직적이고 연쇄적인 테러를 벌인다. 이에 정부는 ‘신세기 테러대책특별법’을 발표한다. 중학교 3학년 1개 학급을 무작위로 선정해 나나하라의 와일드 세븐과 맞붙이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3일, 형식은 2인1조 태그 매치, 미션은 나나하라 사살이다.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시카노토리데 중학교가 BR법 개정 이후 첫 참석 그룹으로 선정되는데, 이중에는 아버지 기타노의 복수를 하기 위해 자원한 노리코도 포함돼 있다. 스키 여행길에 멋모르고 끌려온 나머지 아이들은 외딴 섬에 상륙하자마자 격렬한 총격전에 휘말린다. 와일드 세븐은 이 불청객들 역시 BR의 희생자임을 알고 휴전하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후카사쿠 긴지는 <배틀로얄>에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소년소녀 서바이벌 게임의 배후로 무능하고 사악한 ‘어른들’을 지목한 바 있다. 자신의 꽃다운 청춘을 패전과 상실의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 당시의 기성세대였음을 기억하는 그는 일흔 나이에 열다섯 소년소녀들의 요동치는 반항심과 폭력성을 고스란히 체현한 바 있다. “이제 어른들은 어떡하면 좋을까?”라는 탄식과도 같은 질문은 2편에서도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배틀로얄2: 레퀴엠>은 그러나, 아버지와 다른 시대를 살아온 아들의 영화다. 2차대전이 아닌 9·11이 그가 아는 현실이고, 더 잘할 수 있는 이야기였을 터. 어른들에 대한 아이들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영화는 군사대국인 ‘그 나라’에 대한 성토로 가지를 뻗어나간다.
배우들의 모습을 3D 게임 캐릭터처럼 표현한 포스터 비주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배틀로얄2: 레퀴엠>은 싸우면 싸울수록 막강한 적이 튀어나오는 비디오 게임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외딴 섬에 고립된 BR 참가자들과 와일드 세븐의 대결이 극적인 화해와 연대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무렵, 국가에서 파견한 막강 특수부대의 무차별 습격이 시작되는 식이다. 또 속편의 법칙에 따라, 판이 커지고 싸움이 과격해졌다. 나가사키 해안과 섬에서 촬영했다는 단계별 전쟁신에는 총탄과 지뢰와 폭탄이 난무한다. 교복 차림으로 손도끼나 주머니칼을 어설프게 휘두르던 1편의 아이들에 비하면 전투력만큼은 200%쯤 높아진 셈이다.
액션은 과도하고 메시지는 직설적인 반면, 개개의 캐릭터와 상호관계가 부각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2편의 아이들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처음부터 널 좋아했어”라는 고백을 유언처럼 던지지만, 전편의 슬픔과 공포, 그 신파적 매력과 견주긴 힘들다.
애초 비극적인 라스트를 구상했던 후카사쿠 겐타는 아버지의 조언 때문에 방향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새 세대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믿음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1편의 말미에 “뛰자”라고 힘껏 외쳤고, 2편에서 아들은 “함께 일어서자, 싸우자”고 화답한다. 그렇더라도, 폭력을 통해 비폭력을,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아이로니컬한 화술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온전하게 계승됐다고 말하기엔 이른 시점이다. <배틀로얄2: 레퀴엠>은 2003년 7월 일본에서 개봉해 280만의 관객을 맞았다. 한국 개봉은 4월2일.
후쿠사쿠 겐타 감독 인터뷰"아버지를 ‘배신’한 영화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영화감독을 꿈꾼 후카사쿠 겐타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뒤 도에이 TV 프로덕션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했고, <배틀로얄>에 제작과 각본으로 참여했다.
1편에 비해 감정적이고 직접적인 묘사들이 두드러진다.
촬영 중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처음부터 병세를 알고 있었고, ‘마지막 영화’임을 예감하고 적극적으로 이 기획을 제안하셨다. 속편이 나오기까지 3년이 흘렀고, 제작진도 관객도 국제 정세도 많이 변했다. 그런 변화들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좋은 의미의 배신이라고나 할까. 아버지를 생각하다보니, 더더욱 감정이 깃든 영화가 됐다. 이렇게 크고 깊은 슬픔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다시 없을 것 같다.
미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를 영화 속에 반영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 나라’로 지칭된 군사대국을 반드시 미국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야기의 무대는 가공의 나라다. 이라크전이 터지고 일본에서도 파병을 하는 등 영화의 내용이 현실화된 부분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이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며, 무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국가 대 테러리스트의 대결로 판이 커졌다. 연출상의 어려움은 어떤 것이었나.
아버지와 일하던 스탭 캐스트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열다섯살 때 일본은 패전했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 패전의 경험, 제로에서의 출발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런 변화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아버지가 못다 만든 영화가 자신의 연출 데뷔작이 됐다.
기타노의 딸 시오리가 아버지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첫 장면이 아버지가 촬영한 유일한 신이다. 원래 조용한 신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아버지의 마지막 신은 아주 조용하고 정적인 신이 돼버렸다. 그 촬영 전날 아버지랑 크게 싸워서 현장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엇을 생각하며 그 신을 찍었는지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한 채로 아버지를 떠나보냈기 때문에, 촬영 내내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곤 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스탭들에게 많은 자문을 구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1차 편집본이 너무 길어서, 조·단역의 스토리를 많이 잘라내야 했다는 것이다. 기회가 있다면 디렉터스컷을 만들어보고 싶다.
담임 교사 캐릭터가 전편과 정반대다. 의도한 설정인가.
그렇다. 2편의 담임 역을 맡은 리키는 야쿠자영화와 액션영화에 많이 나왔던 배우다. 그런 캐릭터를 살려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1편의 기타노 다케시가 어른과 아이들의 관계를 강조하는 인물이었다면, 2편의 리키는 젊은 교사로, 아이들 편에 설 수도 있는 캐릭터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2편에 이어 3편을 만들 계획도 있나.
1편을 만든 뒤에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9·11 테러도 일어났고 이라크전도 있었다. 그런 현실의 변화들이 영화와 맞아떨어졌다. 국제 정세에 격변이 일고, 사회가 원한다면, 속편을 또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은 그럴 계획은 없고, 이 스탭 배우들과 다른 작품에서 만날 수 있길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