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나이와 관계없이 자기의 인생을 산다. 아홉살도 마찬가지일 터. 현실과 맞대면하며 희로애락을 느끼고, 그 감정으로 자기 삶의 우주를 채울 것이다. 많은 동화들이 어린이는 어린이다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시간을 미래에 할애해버린다. 이 경우 교훈을 앞세워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과 대화하는 걸 막거나, 철없음과 깨달음만을 강조하며 하나의 주체를 예비주체로 격하시키기 쉽다.(물질적으로 풍요한 시대에 자란 어린이가 시골의 누추한 삶을 겪거나, 어른들의 힘든 과거를 알게 되면서 철드는 이야기가 우리 동화의 태반 아니던가.) 어른의 시선 앞에 어린이를 전시하는 이 경향은, 어린이의 귀여운 모습을 그대로 화면에 재현하는 영화에서 더 유혹이 강하다.
‘유혹’을 이긴 연출위기철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옮긴 <아홉살 인생>은 그 유혹을 잘 버텨낸 쪽에 속한다. 우선 영화의 주인공인 아홉살의 백여민(김석)은 어른의 지도편달로 성장하지 않는다. 거꾸로 여러가지 단점을 가진 어른들을 보며 세상을 알아간다. 경상도 소도시 달동네에 가난하게 사는 여민은 또래 중에 싸움을 제일 잘하는 짱이지만 정의감이 있어서 약자를 보호한다.
한쪽 눈이 먼 어머니에게 색안경을 사주기 위해 이런저런 잔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도 한다. 너무 올곧아 보이는 여민의 모습이나 좋은 편, 나쁜 편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몇몇 에피소드들은 교훈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원작 소설엔 여민이 나쁜 편에 있던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면서 세상의 편을 가르는 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판단이 성숙해가는 과정이 중심을 이루는데 영화는 이 부분을 많이 줄였다.
짱이지만 착한 주인공영화는 대신 서울에서 전학와 여민의 짝이 된 여학생 장우림(이세영)과 여민의 ‘로맨스’를 중심에 배치한다. 예쁘장하고 옷도 세련된 우림은 단번에 여민의 마음을 잡아채지만, 속이 좁고 까탈스럽다. 서울내기 답게 얌체스러워서, 여민에게 마음을 내주는 것같다가 바로 시치미 떼면서 여민의 속을 태운다. 세련되지 못하고 우직하기만 한 여민은 자꾸만 속을 앓는다.
그 풍경의 묘사가 ‘아홉살 인생’을 독립된 인생으로 대하는 것같다. 가끔씩 예쁜 우림의 얼굴 클로스업이 많은 등 어른들의 로맨스 연출을 재현하는 듯한 우려도 들지만, 달리 보면 어른의 로맨스와 어린이의 로맨스가 크게 다를 이유도 없을 터. 구애하고 토라지고 질투하는 아이들 모습이 어른 뺨쳐서 웃기기도 하지만, <아홉살 인생>의 로맨스에 빠져들게 하는 건 극작가 이만희가 각색한 이 어린이들의 대사다. (화가 난 여민이 우림에게)“앞으로 니랑 말 안 할끼다.” “못 들은 걸로 할께.” “아니다, 들은 걸로 해라.”
어린 배우들 연기 돋보여<아홉살 인생>에서 어린 배우들의 연기는 유달리 돋보인다. 장진영을 닮은 듯한 우림 역의 이세영은 속좁고 얌체같은 여학생 역을 잘도 해낸다. 우직한 여민도 마찬가지고, 여민을 좋아해 우림을 질투하는 여학생 오금복 역의 나아현의 우는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가슴을 싸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바리케이드> <마요네즈>의 윤인호 감독. 26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