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새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2004-03-23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12시간, 예수 고통 1000% 재현

2월25일 미국 개봉 이후 격렬한 반유대주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엄청난 흥행성공을 거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4월2일 국내 개봉한다. <얼굴없는 남자>(1993), <브레이브 하트>(1995)를 연출했던 배우 멜 깁슨이 각본, 감독, 제작을 맡은 영화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2500만 달러의 개인돈을 털었다고 한다.

영화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지상의 생을 마감하기 전 12시간을 그린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직후 게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드린 기도와 유다의 밀고로 체포되기까지의 과정, 잔인한 로마병사의 고문과 인민재판에 가깝게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유대인들의 집단광기 등이 신약성서 네편에 바탕해 매우 세밀하게 재현된다. 어떤 시대적 배경도 영어로 소화하는 할리우드의 관습과 달리 이 영화는 예수 당대에 실제로 쓰였다는 아람어(셈족에 속하는 아람인의 언어)와 라틴어로 진행된다. 모든 것을 ‘그때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의지에서 영화제작에 나선 멜 깁슨은 한때 자막없는 상영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찢어지는 피부, 떨어지는 살점, 부서지는 뼈…사재 2500만달러 털어 극사실화처럼 그려내. 아픔보다 더 공포감이 느껴지고 영화적 재미? 그런 건 없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줄거리나 어떤 사건 또는 새로운 해석이 아니다. 줄거리나 영화적 짜임새만 보자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매우 단순하고 평범한 영화다. 대신 영화는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 서구인들에게는 모국어처럼 익숙한 이야기라는 전제 아래 전후의 맥락에 대한 설명을 거두고 예수가 당한 육체적 고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나무 몽둥이와 채찍 등을 사용해 길게 이어지는 로마병사의 고문 장면은 예수의 찢어지는 피부와 뚝뚝 떨어지는 살점들, 부서지는 뼈를 극사실화처럼 그려낸다. 예수는 극악한 폭력을 묵묵히 감내하며, 그가 흘리는 피의 양이 늘어날수록 유대교 제사장을 비롯한 예수의 고향 갈릴리인들의 증오는 더 뜨거워지고 이 가운데 이성을 잃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빌라도 총독처럼 보인다.

미국에서 뜨거웠던 반유대주의 논쟁이 국내에서 재현될 가능성은 없겠지만 영화만 본다면 멜 깁슨이 인터뷰를 통해 어떤 부연설명을 했든 간에 유대인이 무지한 광신도처럼 묘사되며 그들이 결국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 또는 주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보는 것 자체가 고문으로 느껴지는 육체적 폭력의 강도다.

멜 깁슨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기꺼이 감수한 예수의 고통을 관객들에게 투사해 종교적인 반성을 이끌어내려는 것 같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국한한다면 이는 타당한 설교, 또는 특별한 영적체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슬픔이나 아픔보다는 공포감이 더 크게 느껴지고, 감독의 ‘숭고한’ 의지조차 위협처럼 해석될 만하다.

설득이나 설명 대신 피로 칠한 화면을 들이대는 한 인물(멜 깁슨)의 절대적 신념이 로마병사가 휘두르는 쇳조각 달린 채찍만큼이나 섬뜩한 폭력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이 영화의 문제다. 하나 더. 수많은 액션 영화에 길들여져 이 영화의 폭력수위를 감당할 수 있는 할리우드 키드라 할지라도 종교적 체험이 아닌 영화적 재미를 찾아 극장에 왔다면 잔인함보다 아무런 새로움이 없는 평면성과 지루함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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