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이와이 순지 감독의 3년 만의 장편 신작 <하나와 아리스>
2004-03-23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이와이 정원에 핀 유리알 소녀들

14살의 봄, 절망의 끝에 다다랐던 소년,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이후 이와이 순지 감독의 3년 만의 장편 신작 <하나와 아리스>(상영시간 2시간15분)가 지난 3월13일부터 일본에서 개봉됐다. <러브레터> 등을 통해 아름답고 향수어린, 하지만 자신이 가공한 ‘정원’ 같은 세계를 그리던 그가, 근작 <릴리 슈슈…>에선 이지메 문제 등 강렬한 사회적 터치를 가한 터라 새 작품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와 아리스>의 첫 느낌은 다시 이전 이와이 감독 스타일이라는 점일 게다. 눈시린 벚꽃 나무 아래를 달리는 두 여고생의 이미지와 두 주인공이 한 남자선배와 기묘한 삼각관계를 맺는다는 줄거리는 순정만화를 연상시킨다. 여기다 이와이 감독의 영화답게 ‘기억’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짜넣는다. 그런데 그 느낌은 한층 여유롭다. 마치 관객에게 ‘이런 걸 기대하고 있죠?’라는 듯 감독 스스로 유쾌한 작업을 했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일본에서 주가를 높이고 있는 17살과 19살의 배우, 스즈키 앙과 아오이 유우가 맡은 하나와 아리스는 막 고등학교에 진학한 단짝 친구다. 덜렁거리는 하나는 요즘 애들답지 않게 지하철에서도 라쿠고(일본의 전통적인 독백희극)만 외고 다니는 미야모토 선배에게 반해 전체부원 단 2명인 라쿠고 서클에 덜컹 가입한다. 어느 날 선배의 뒤를 쫓던 하나는 선배가 기절하는 현장과 마주친다. 눈을 겨우 뜬 선배에게 “저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 기억 못하세요? 선배 기억상실증이에요”라고 말한다. 거짓말이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친구 아리스까지 여기에 끌어들이면서 셋은 기묘한 삼각관계에 접어든다.

<하나와 아리스>는 지난해 한 기업이 상품 홍보용으로 이와이에게 의뢰해 완성한 3장짜리 단편영화에서 출발했다. 분위기는 코믹하기까지 하다. 이와이는 “일본인들은 영화에 대한 경외감이 너무 지나쳐서인지 극장에서 웃는 것을 삼가는 분위기가 강하다. 특히 내 작품은 끝까지 마지막까지 어떻게 보아야 할 지 몰라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번엔 “작정하고 희극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소녀 짝패 주인공은 “이전에 CF 프레젠테이션에서 기각되고 1년짜리 시리즈로 제안했다가도 ‘킬’된 경험이 있어 ‘복수하는 마음’이 들어간 소재”라고. 어찌됐든 여성의 심리 묘사에 탁월함을 보여줬던 이와이인 만큼 이 주인공들은 ‘이와이 표’ 영화에 썩 어울리는 인물들이다. 이와이는 이 악의없는 거짓말을 일삼는 여자 주인공들을 “작은 악마 같다”고 표현한다. “여자들을 관찰하면 이상한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남자와 헤어질 때 ‘좋아하지 않게 됐어’라는 말을 쉽게 하지 않나. 절대 남자들에겐 있을 수 없는 대사다. 남자들은 그러면 비겁자가 되니까. 같은 말을 여자가 하면 강해 보이고, 남자가 하면 비겁해 보이니….”(<키네마준보> 인터뷰) 꼬리를 문 거짓말로 점점 코믹해져가는 상황 속에서도 여자와 남자의 다른 심리가 언뜻언뜻 드러난다. 기억이 있어야 사랑한다고 믿는 소년, “지금이 행복하면 되지 않냐?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라고 말하는 소녀처럼. 영화 속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 때문일까, 주연인 스즈키 앙과 아오이 유우는 자연스러운 대사와 매력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놓았다.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영상적으로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이번 영화에서도 이와이의 장기는 역시 드러난다. 아버지로부터 건네받는 만년필, 마음을 설레게 할 만큼 예쁜 분홍색의 트럼프 등 작은 소도구 하나하나에 소녀들의 감정을 담아놓은 것이나, 소녀들의 발레교습소, 라쿠고 발표 등의 시적인 느낌들이 그렇다. 이번엔 곳곳에 영화를 보는 재미도 숨겨놓았다. 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이름은 ‘데즈카’(데즈카 오사무의!) 고교. 아톰 50주년이 떠오르도록 50회를 맞은 학교 축제에선 정글 대제 공연이 벌어지는가 하면, 하나와 미야모토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교실 창문으론 아톰의 거대한 풍선이 떠다니기도 한다.

<릴리 슈슈…>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하나와 아리스>에 대한 일본 내 평가는 나쁘진 않지만 절찬 정도까지는 아니다. 개봉관 숫자나 관객 수도 적다. 물론 ‘여유의 걸작’(<키네마준보>)이라는 찬사도 있지만, 장기인 영상미를 보여주기 위해 사족이 많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한다면 이와이의 팬들에겐 그만큼 즐거운 영화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하나와 아리스>는 애정영화 또는 청춘영화라 규정짓기엔 좀더 넉넉한 감정을 가졌다. 초기 작품들의 코드가 ‘향수’였다면(특히 를 떠올린다면) <릴리 슈슈…> 이후 이와이는 분명 ‘현재’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하나와 아리스는 바로 지금의 아이들이다. 영화가 그리는 건 과장된 성장의 아픔, 고통 같은 게 아니다. 거리에서 매니지먼트 회사에 스카우트된 아리스는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 그는 철없는 엄마와 살며 궂은 집안 살림은 도맡아 할 정도로 어른스러운 면도 있지만, 그저 16살 보통 소녀일 뿐이다. 한 오디션에서 ‘어른들’은 “철학관이 뭔가?”라 묻는다. “철학이… 뭔데요?” “음, 살아가는 데 이 길로 가야겠다거나 그런 생각.” 돌이켜보면 세상에 자신의 철학관을 일찌감치 명제로 정리해놓고 살아가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 어찌보면 ‘멍∼하게’ 살아가는 모습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자신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나가는 소녀들의 이야기는 분명 희망적이다. 후반부 오디션장에서 토슈즈 대신 종이 테이프를 발에 감고 발레를 하는 아리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리는 경험은 흔한 게 아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내게 <러브레터> 등은 재미있으되 큰 감동은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릴리 슈슈…>를 돌아나온 이와이는 이제 자신만의 정원 안에서도 ‘감동’을 전해주는 작가가 된 듯하다. 잔잔한 소품이지만, 그런 점에서 <하나와 아리스>는 ‘이와이의 모든 것’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한국에서 아직도 잠자고 있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개봉을 촉구합니다).

:: <하나와 아리스>의 음악-음악감독 이와이 순지

대사가 길지 않은 <하나와 아리스>에서 음악은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대변한다. 첫 장면 겨울 전철역을 뛰어가는 소녀들 위로 흐르는 조용하며 단순한 피아노 선율부터 아리스가 발레를 할 때 들리는 부드럽고 격정적인 곡까지, 잔잔하며 따뜻한 음악이 인상적이다. 이 음악을 맡은 이는 다름아닌 이와이 순지 감독. 언뜻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들리는 곡도 사실은 이와이 감독 혼자서 컴퓨터로 한 음, 한 음을 겹쳐가며 만들어낸 디지털 사운드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고 대학생 땐 혼자 여러 곡을 쓰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면 절로 선율이 떠올랐다. <스왈로우 테일> 이후 영화음악을 한번 해보고 싶어졌다.” 97년경부터 혼자서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 하나. 자신이 찍은 광고는 물론 (1998)의 음악도 사실은 이와이가 만들었지만, 자신이 없어서 가공의 남녀밴드 이름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슬금슬금 인터넷에 내가 익명으로 음악을 만든다는 소문이 퍼져버렸다. 거기다 실명으로 해야 책임감도 생기고, 이 정도면 괜찮겠다 라는 자신감도 붙어서 지난번 단편 <아리타> 때부터 이름을 내걸기 시작했다”고. 다재다능한 감독의 또 하나의 선물인 셈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