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영화의 반대말이 ‘좋은’ 영화가 아니라 ‘착한’ 영화가 될 때 그 말은 매우 교활해진다. 그것은 곧장 우리로 하여금 기대의 지평을 끌어들이고, 거기에 기대서 세상을 보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 속의 현실은 점점 더 거기서 멀어지거나, 혹은 세상의 모순에 대해서 눈멀게 만든다. ‘나쁜’ 영화는 우리를 비겁한 죄인으로 만들지만, ‘착한’ 영화는 무기력한 바보로 만든다.
위기철이 1991년에 발표한 지 10년 만에 문화방송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가 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긴 윤인호의 <아홉 살 인생>은 선한 의도로 가득 차 있다. 윤인호와 (시나리오를 쓴) 이만희, (기획한) 서현석과 황지웅, (프로듀서) 정종헌의 선한 의도는 기꺼이 위기철의 원작 소설이 지니고 있는 현실 속의 모순과 구체적인 슬픔마저도 내다 버릴 만큼 착하다.
그러나 그들은 위기철의 동화를 오해한 것이다. 사실상 위기철의 동화는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아이들)을 위한 가난한 자의 철학이다. 1970년대 서울 달동네를 무대로 하여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뒤엉켜 만들어내는 저 빈곤의 슬픔 속에서 25개의 단장으로 이루어진 이 동화는 아이들의 언어를 빌려 철학적 우화를 만들어낸다. 마치 점묘법처럼 이루어진 달동네 인물군상들의 에피소드들, 그들의 삶 속의 쓰디쓴 패배와 시련. 그리고 그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결국 그 아이들이 커서 1980년대에 강철로 단련될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아홉 살 주인공 백여민은 “거기 살지도 않으면서 땅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이 있는 세상”을 끝내 인정하지 않는 숲 속의 외로운 철학자이며, “어떤 슬픔과 고통도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회피하려고 들 때 도리어 더 커진다는 사실!”을 깨우쳐 가는 가난한 자들의 건강한 생명력이다.
원작소설에 대한 배신에서 한발더…사실상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위기철의 동화를 만화로 옮긴 이희재의 <아홉 살 인생>이 그 서정적인 필법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았을 것이라는 향수에 젖으면서 “그 곳에 따스함이 있었습니다”라는 에필로그를 더한 것은 원작이 지닌 의도의 배신이다. 그리고 영화 <아홉 살 인생>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사실상 원작(의 의도)에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아이들(같은 어른)을 위한 동화이기 때문이다.
무대는 1970년대 경상도 어느 시골의 작은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로 옮겨간다. 토굴 할매를 비롯한 원작 속의 몇몇 인물은 사라지고, 영화는 ‘어른 같은 아이’ 백여민과 (서울에서 전학 온 것으로 설정이 바뀐) 장우림의 ‘로맨스’에 집중한다. 대부분의 쇼트는 단순하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자기 순서를 기다린 다음 대사를 하고 기약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월급기계’ 담임 선생의 가난한 아이들을 향한 폭력, 골방 철학자와 피아노 처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계급모순으로서의’ 사랑, ‘베트남에서 돌아온’ 외팔이 강냉이장사인 하 상사의 순정,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맞고 자라는 5학년 ‘검은 제비’의 슬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난으로 툭 하면 집을 비워야 하는 아버지와 한쪽 눈을 잉크공장에서 잃은 어머니로 인해 안아야 하는 여민의 구체적인 분노와 그것을 통해 세상의 질서를 깨우쳐 가는 현실적인 슬픔은 모두 사라졌다.
오직 남은 것은 ‘종잡을 수 없는 년’ 장우림이 전학 와서 벌이는 가벼운 소동과, 그를 둘러싼 ‘세련된’ 서울 아이와 ‘순박한’ 시골 아이(들)의 갈등과 화해뿐이다.
영화는 아홉 살에서 끝난다. 장우림은 백여민에게 어머니의 한 쪽 눈을 가리라고 ‘비싼’ 선글라스를 선물하고 눈 내리는 날 다시 서울로 전학 간다. 거기에는 선의와 향수가 넘쳐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달동네 그 아이들은 내년이면 열 살이 될 것이다. 열 살이 될 때 세상은 더 고통스럽고, 힘들어질 것이다. 70년대가 끝나면 그 달동네 사람들은 철거빈민이 되어 거리로 내쫓길 것이며, 백골단의 몽둥이와 전경들의 최루탄이 기다릴 것이다. 왜 당신들은 마치 80년대를 살아온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70년대를 다루는가. 험상궂은 세상의 낭만이란, 허망하게 깨지기 쉬운 낙엽 같은 것. 이 동화책 249쪽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