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새영화] 짜릿한 두뇌게임 <범죄의 재구성>&감독 인터뷰
2004-04-07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한국영화에서 느끼기 힘들던 짜릿한 두뇌게임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관객이 원해서인지 제작자의 역량 탓인지 모르겠지만, 충무로는 ‘머리’보다 ‘가슴’에 호소하는 영화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해왔다. <텔 미 썸딩>, <자카르타>, <피도 눈물도 없이> 같은 머리 중심의 영화가 간간이 나왔지만 영화가 끝나도 몇개 빠져 보이는 지퍼의 이가 통쾌함보다는 석연찮은 여운을 남기곤 했다. 15일 개봉하는 범죄 스릴러 <범죄의 재구성>은 영화가 끝나도 ‘두뇌게임’이라는 홍보카피가 무색해지지 않는 ‘잘 빠진’ 장르영화다. 꼬이고 또 꼬이는 사건들, 앞의 사건과 뒤의 사건이 맞물리면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줄거리와 분할되는 화면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의 한국 영화에서 느끼기 힘들던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 있다.

각계의 전문 사기꾼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댔을 때 책상 위에 걸어놓을 만한 모범사례는 <오션스 일레븐>일 터. 갓 출소한 창혁(박신양)이 작대기(전과) 하나 없는 사기계의 전설 김 선생(백윤식)을 찾아가고 잡학박사 얼매(이문식), 위조지폐 기술자 휘발류(김상호), 여자 킬러 제비(박원상)를 규합해 한국은행 50억원 인출 계획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때만 해도, 첩첩이 경호막에 쌓였던 돈다발을 여유만만하게 금고에서 그들의 차 안으로 옮길 때만 해도, 이들은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피트(<오션스 일레븐>의 주인공들)가 부럽지 않았을 터. 그러나 수송차량 가득히 돈을 채우고 난 다음부터 일은 꼬이고 엉키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범죄의 재구성>은 <오션스 일레븐>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사건은 발각되고, 은행에 남아있던 얼매는 잡힌다. 창혁의 차는 추격당하고, 돈다발이 든 차는 사라졌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진 나머지 사람들. 여기에 김 선생의 동거녀 인경(염정아)이 개인 작업을 위해 창혁의 형 창호의 집에 들어가면서 이들의 사기극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범죄의 재구성>은 관객과의 두뇌싸움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유주얼 서스펙트>나 <메멘토>처럼 반전이라는 하나의 목표지점을 향해 건조하게 나아가지 않는다. 반전은 등장인물과 시간대에 따라 작게 쪼개지고, 카메라는 등장인물의 디테일을 세밀하게 잡아내려고 애쓴다. 거사를 위해 모였을 때 김 선생을 제외한 인물들은 시시껄렁한 잡담 하기에 더 바쁘다. 이런 모습은 이들이 서로 프로페셔널임을 떠벌이지만 실은 각자의 구린 속내를 숨기고 있는 삼류사기꾼임을 슬쩍 드러내고 서로에 대한 의심과 불신 속에서 예정된 파국을 암시한다.

물론 <범죄의 재구성>이 완벽하게 재구성된 퍼즐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구석도 있기는 하다. 베테랑 냄새를 품기면서도 사건의 중심을 어처구니없이 놓치는 차 반장(천호진)의 실수나 창호, 창혁 형제의 사연을 손쉬운 방법으로 슬쩍 봉합하는 것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새끼줄처럼 1분 단위로 꼬이는 사건들뿐 아니라 수시로 플래시백을 통해 끊임없이 넘나드는 과거와 현재의 아귀를 빠뜨림 없이 촘촘하게 맞춰내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게 여겨진다. 백윤식과 박신양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연기자들의 뛰어난 ‘팀플레이’도 이 영화가 매끈하게 빠지는 데 큰 몫을 했다.

[최종훈 감독 인터뷰] “시나리오 홀로 완성했다”

<범죄의 재구성>은 제작 전부터 탄탄한 시나리오로 입소문을 탔던 영화다. 임상수 감독의 <눈물> 연출부로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은 최동훈 감독(33)은 1고부터 17고 완성본까지 홀로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감독 신고를 했다. 시사회 뒤 데뷔작 같지 않은 데뷔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최 감독은 대학때부터 <엘에이 컨피덴셜>의 제임스 엘루이나 엘모아 레너드 같은 소설가에 ‘몰래몰래’(그는 국문과 출신이다) 환호했던 범죄소설광. 못지않게 70년대 미국 영화광이었던 그는 “무조건 드라마를 잘 만드는 영화가 좋다”고 창작관을 피력했다.

충무로에서 아직도 낯선 장르인 스릴러로 첫 영화에 도전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드라마가 촘촘하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범죄는 늘 매혹적인 소재였고. “모든 감독은 내가 얼마나 잘 찍는지 봐라, 하는 마음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아무개 선배 감독의 말대로 남들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

왜 사기꾼 이야기인가.

사기꾼 이야기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우리 영화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다. 이 영화의 사기꾼들은 일류가 아니라 삼류다. 승리한 사기가 아니라 실패한 사기, 일류를 꿈꾸는 삼류들의 지리멸렬한 인생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총재산이었던 전세금 1800만원을 떼먹힌 적이 있다. 물증 잡는다고 혼자 미행하고 다니면서 겪었던 일들도 이쪽 이야기를 그리는 계기가 됐다.

삼류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루는 방식은 매우 장르적이다.

신파로 가지 말고 쿨하고 드라이하게 가자는 생각이었다. 흔히 영화가 자극하려는 휴머니즘이나 센티멘털리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니 주변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더군(웃음).

계속 장르영화로 갈 건가.

재미를 위한 투쟁은 영원하다(웃음). 여기에 장르적 쾌감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야기의 형식은 다르겠지만 다음 작품도 은행강도 이야기다. 74년 은행강도를 하고 칼빈총으로 가족과 몰살한 이종대-문도석 사건을 영화로 재구성해보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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