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 창작자의 인격이라는 말이 들어맞는 때가 있다. 장터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윤인호 감독과 그의 영화 <아홉살 인생>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전작 <바리케이드>와 <마요네즈>도 마찬가지다. 그가 만든 영화들에 대한 공통된 반응은 “영화가 착하다”거나 “시선이 따뜻하다”는 것이다. 소외된 이들, 잊혀진 시간, 가족의 이야기를 즐겨 다루는 윤인호 감독은 함께 일한 이들에게도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일이 유난히 많다. 특히 <아홉살 인생>에서 함께 일한 어린 배우들과 ‘유사가족’이랄 만큼 밀접해진 그는 영화의 흥행보다 아이들의 장래를 더 많이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홉살 인생>의 아이들, 감독의 아홉살 시절, 그리고 영화 이야기를 윤인호 감독에게 청해 듣는다.
영화 끝나고 소감을 물었을 때 아이들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거짓말을 많이 한 게 미안하다. 누가 누굴 좋아하고, 그런 일이 많았는데, 한 아이는 좀 심각했다. 그 사람도 자길 좋아한다는 게 확인 안 되면, 아무것도 안 할 태세였다. 그래서 그 사람도 널 좋아한다, 그랬다. 애들이 물에 빠지는 신을 찍을 때도 수심이 꽤 깊었는데 1m밖에 안 된다 그랬고, 잡고 있겠다 해놓고 손을 놨다. 내가 애들을 좋아해서, 많이 예뻐하면서 촬영한 대신 소품부, 미술부, 조감독이 악역을 맡아 군기를 잡아줬다. 고맙게 생각한다.
영화 찍고나서 아이들이 어떻게 달라졌나.
영화 보고 항의들 많이 하더라. 고생해서 열심히 찍었는데, 왜 잘랐냐면서. 안부 묻는 전화도 자주 받는다. 오디션 때 일부러 내성적이고 집중력 있는 애들을 선택했는데, 영화 찍으면서 성격들이 많이 달라졌다. 개봉하고 나면 일일이 가정 방문을 갈 생각이다. 매스컴에서 주목하고, 당장 왕자 공주가 된 것 같아도, 다 꿈이다, 그걸 이해시키려고 한다. 착한 아이들이다. 불경기라고 부모 걱정하고 그런다. 다행히 영화 찍고 나서, 기종이네 곱창집도 손님이 늘었고, 금복이네 가스집도 그렇다고 한다.
대부분 연기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라, 다루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만큼 보람도 컸겠고.
애들 하나하나 내 기준으로, 역할에 맞춰 뽑을 수 있었다는 게 좋았다.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라, 카메라가 언제 멈추고 가는지,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몰랐고, 그래서 인내심이 필요했다. 스탭들도 그래서 피곤해했다. 나로서는 씨 뿌리고 꽃 피는 과정까지를 지켜보는 보람이 컸고, 아이들의 에너지가 내게 큰 동력이 됐다. 감독이라는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여민이 역의 석이가 담임에게 맞는 신을 찍고나서 앰뷸런스에 실려갔다. 내 만족을 위해 애들을 괴롭히다니, 영화보다 중요한 건 애들인데 말이다. 그렇게 애들이 힘든 신을 찍은 날은, 일찍 촬영을 접은 일이 많았다. 애들과 눈을 마주치는 게 힘들었다. 아동심리학이라도 미리 공부했어야 하는 건데, 후회스럽고 미안하고 그랬다.
그래도 연기들이 참 자연스럽다. 어떻게 그런 연기를 이끌어낼 수 있었나.
아이들을 알아가면서, 시나리오와 달리 가는 부분들이 더러 생겼다. 누가 누구랑 있을 때 에너지가 많이 나오나, 하는 걸 보면서, 신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촬영 끝나고 애들끼리 노는 걸 비디오카메라로 찍어서 연구하고, 애들 앨범을 가져다 성장과정을 파악해, 데이터를 만들어뒀다. 데이터가 있으니, 답도 쉽게 나왔다. 여민이가 내 분신이라, 석이와는 많이 가까운 사이였고, 또 연적 관계인 금복이와 우림이는 평소에도 경쟁을 많이 시켰다.
반면 어른들 이야기가 튄다는 지적이 있다. 과장된 듯한 연기 톤도 그렇고, 에피소드도 그렇고.
연극 배우를 많이 썼는데, 그들 스타일과 아이들의 스타일이 잘 어우러지지 못한 건 나도 아쉽다. 배우 잘못이 아니라 감독 잘못이다. 그들 나름의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애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시킨 부분이 있다. 이야기가 진부하다, 식상하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대중적인 것이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이야기. 그런 게 추억 아닌가.
황기성 사장님이 원작 판권을 사서, 이만희 작가에게 각색을 맡기고, 초고가 나온 뒤에 내가 합류했다. 캐릭터를 아주 잘 잡았더라. 그래서 이 시나리오라면 재밌게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내가 손을 댄 것은, 부산 사투리를 강화하고, 상황과 대사를 좀 바꾸는 정도. 원래 엔딩은 밝고 예뻤는데, 이별과 내레이션으로 약간은 쓸쓸하게 바꿔봤다.
감독 본인의 아홉살 시절과 비슷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반영됐나.
말투는 그때 내 것과 거의 같다. 그리고 그맘때 내게도 떠나보낸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들과 싸움도 많이 하는 편이었고. 다른 점이 있다면, 여민이는 효자고, 나는 아니었다는 것 정도.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어려서 부모님 때문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고, 그래서 내 삶은 이별의 연속이었다. 집안에서 자꾸 튕겨져 나가려는 아들이었다. 가족은 내게 결핍된 부분이다. 그래서 자꾸 가족영화에 집착하는 것 같다. 이번 영화는 부모님에게 쓰는 ‘반성문’과 같다.
이미 세팅된 영화에 합류한 건 처음이다. 이 영화의 어떤 점에 가장 끌렸나.
나를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추억을 다룬 영화 대부분이 ‘저땐 저랬지’라는 객관적인 공감은 끌어내지만, 자신의 오래된 일기장을 들춰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린 모두 추억의 힘으로 사는 것 같다. 이 추억의 힘으로 앞으로 10년 더 똘똘하게 살아보자, 그런 마음이었다.
계속 원작이 있는 영화만 했다. 우연인가.
똑같이 원작이 있는 영화라고 해도, 요즘 한참 유행하는 인터넷 소설 같은 건 내 과가 아닌 것 같다. 내 경우는 원작 없는 영화는 이상하게 안 되더라. 청계천 노동자, 혼혈아, 위장결혼 같은 아이템을 진행시킨 적이 있었는데, 만들어보자는 제작자가 없었다. 작은 규모, 진지한 소재도 재밌게 만들어질 수 있는데, 그런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 같다. 감독에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파이를 키워야 한다면서, 100억짜리 영화 1편 만드는 게, 10억짜리 영화 10편 만드는 것보다 낫다고들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다. 제작투자자들 성경책엔 그렇게 쓰여 있는가보다.
올해 첫 테이프를 끊은 가족영화다. 가족영화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나.
내 부모 세대만 해도 극장과 거리가 먼 세대다. 곧 영화를 보던 세대가 부모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족 단위의 영화 관람도 자연스러워질 걸로 믿는다. 몇년 지나면, 확실한 시장이 생겨나지 않을까.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아홉살 인생> 이전에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와 신경숙의 <그가 모르는 장소>를 진행 중이었는데, 여건만 허락된다면 이 작품들을 만들고 싶다. 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보다는,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