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변화충동, <아라한-장풍대작전>의 류승범
2004-04-19
글 : 오정연

스무살의 류승범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처연한 눈밭 위로 쓰러지는 안쓰러운 소년이었다. 그로부터 5년. 미워할 수 없던 친근한 루저가 <아라한-장풍대작전>을 통해 본격적인 영웅담의 주인공이 됐다. 5년 전 인터뷰에서 그는 “아직 배우가 내 길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던가. 소년 류승범은 성인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이 배우임을 인정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배우가 이루어야 할 학문, 연기와 인생은 어디쯤 가고 있는지가 궁금해진 것은 당연한 순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변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 사이 그에겐 매니저도 생겼고, 그는 세편의 드라마와 일곱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배우 류승범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시나리오도 생겼다.

현재는 미래다

그가 요즘 읽고 있는 책 <현재는 없다>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그의 인생관을 대변한다. “지금 내가 말하는 순간은 이미 과거다. 동작을 취하면, (손을 앞으로 쓱 뻗으면서) 과거가 돼버리는 거다. 사람들은 현재에 충실하자고 말하지만, 실은 과거와 미래밖에 없다. 내가 한번 이렇게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해놓구선, 다시 이렇게 (손을 끌어당기면서) 한다고 과거를 주워담을 수는 없지 않나. 그러니까 흘러간 것에 대해 자책하는 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결국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내가 미래에 대해서 직시하고 충실히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맙소사. 준비라니. 그가 연기했던 그 어떤 캐릭터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그 인생관에 잠시 아득해진다. “사실 난 ‘이건 류승범이 아니면 못해, 그래서 이건 그냥 명예의 전당에 올려놓고 아무도 건드리면 안 돼’ 싶은 작품을 하고 나면 미련없이 이 일을 그만둘 거다. 근데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그런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 준비 중이다.” 지나간 기회를 땅을 치며 후회해본 평범한 인간으로서 던지게 되는 질문. 과연 그런 작품을 만나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당연하다. 준비를 하고 있다면, 알 수 있다.” 너무나 확신에 가득 찬 대답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연기

유독 준비를 강조하는 그 인생관 때문일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한 그의 연기를 보면 그 연기의 절반은 애드리브일 것 같지만 이 역시 편견에 불과하다. “애드리브라는 말, 즉흥적이라는 거 자체를 안 좋아한다. 대부분 촬영 전에, 나는 이렇게 해석을 하기 때문에 시나리오에서 이렇게 변경을 해서 연기를 하고 싶은데, 어떠냐고 물어본다. 카메라 돌아가고 있는데 즉흥적으로 연기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너무 애드리브를 해버리면 찍을 때는 재밌어도, 나중에 편집할 때 보면 튄다. 더군다나 영화는 배우의 개인기를 찍는 게 아니라 작품을 찍는 거 아닌가. 송강호 선배님 연기의 백미는 분명히 애드리브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시나리오부터 있었던 설정이었고, 시나리오대로 한 거겠지 했던 거는 애드리브라는 점이다. 즉흥연기를 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한다.” 선배들에게는 깍듯한 후배이기도 한 류승범은, 존경하는 연기자를 묻는 질문에 십여분이 지나도록 일일이 선배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연기의 장점을 들고 있었다. 나름대로 정확하고 예리한 지적들을 넋을 놓고 듣다보니 그가 연기에 관한 정규교육을 전혀 받은 바가 없음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명쾌한 답변이 돌아온다. “연기를 누가 가르쳐 주나. 그냥 술 열심히 마시고 열심히 살려고 한다. 그러면 연기는 좋아진다고 믿는다.”

형, 그리고 감독 류승범

어린 시절, 밤마다 피곤에 찌들어 집으로 들어오는 형을 보면서 영화가 무슨 노가다인가 싶을 때에도 류승범에게 있어 형 류승완은 감독이었다. 그러나 정말 감독 류승완을 배우 류승범이 신뢰하게 된 작품은 <아라한-장풍대작전>이다. “이건 우리가 감독과 주연배우로 만난 최초의 작품이다. 그래선지 이번에는 현장에서 배우와 감독 사이에 생기게 마련인 갈등도 생기더라.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서로 영화에 대한 애정이 많아졌다는 얘기니까 별로 나쁜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른 감독과 작업할 때와 류승완 감독과의 작업을 비교한다면, 형의 영화이기에 남다른 자세로 임하진 않을까. “형이 잘되면 내가 잘되는 거고 내가 잘되면 형이 잘되는 거니까, 열심히 하게 되는 면이 있다. 근데 어떤 작품을 해도 내 작품이기 때문에 열심히 한다. 사실은 류승완은 감독이기 이전에 형이기도 하니까.” 말이 꼬이고 있다. 이를 지적하자, “하하하. 말 한마디 잘못하면 평생을 형 영화만 출연하게 되는 건 아닌가 좀 조심하게 된다”고 너스레를 떤다. 멀리는 뤼미에르 형제부터 가까이는 워쇼스키 형제까지 숱한 형제들이 영화사를 풍부하게 만들어왔지만, 감독과 배우가 형제인 경우는 모르긴 몰라도 흔한 경우는 아니다. 아닌 듯해도 감독과 배우의 작업에는 서로가 속고 속이면서 서로의 능력을 이용하는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보면 그렇듯 피말리고 비인간적인 과정을 형과 함께했기에, 그의 연기가 그처럼 신선하고 진심어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5년 전 류승범은, 자신이 알고보면 막나가는 양아치가 아님을 강조해야 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를 생각없는 젊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뷰가 많이 능수능란해진 것 같다면서, 넌지시 스스로의 변화를 감지하는지 질문을 던져본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변했고, 나라는 사람도 달라졌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제일 기분 나쁜 말이 10년이 한결같은 배우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데, 나쁘든 좋든 일단 변화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의 표현대로라면, 소년이 늙어 변하는 것은 당연하고, 연기는 술과 인생을 따라 늘게 마련이다.

사진 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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