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영화의 오이디푸스, 잠재적 아버지로서의 소년
<씨네21> 446호 ‘기획’에서 허문영은 전쟁 직후의 폐허에 원빈만을 남겨둔 <태극기 휘날리며>의 결말로부터 한국영화의 ‘소년성’을 추론해낸다. 공동체를 대변하는 영웅이 아니라 공동체와 무관하게 홀로 남겨진 소년이 성장영화의 큰 틀에서 한국영화의 대성공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몇장 뒤에는 최근의 페미니즘 논쟁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 황진미의 <사마리아> ‘영화읽기’가 실려 있었다. 상당한 공감과 부분적인 이견을 촉발한 두 글에 하나의 화답이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은 <사마리아> 역시 주인공을 홀로 남겨두며 끝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성별이 다를 뿐. 아버지 없는 이 두 소년소녀는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없다. 그래서 김기덕의 지정학이 중요해진다. <태극기…>가 대박의 신화를 쓰는 동안, <태극기…>로는 엄두도 못 낼 상을 탄 <사마리아>가 완벽하게 소박맞았다는 점은 영화산업의 명암으로만 치부될 문제가 아니다. 여기엔 사회의 무의식과 공모하거나 단절하는 텍스트의 무의식이 관여하고 있다,는 게 이 글의 전제다.
가족 삼각형의 회귀 - 반영웅은 오지 않았다
가족삼각형을 들이대는 일도 식상할 때가 됐건만, ‘아버지-어머니-소년’의 도식이 계속 유효한 건 한국영화가 새 천년에도 여전히 유사가족의 테두리에 결박돼 있는 탓이다. 특히 아버지는 인물로는 부재해도 흔적으로 존재하며, 그 상징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정된 법과 제도, 그것을 구현한 공동체 등임은 정신분석의 상식이 되어 있다. 남재일은 한국 근대사에서 국가라는 아버지의 부재를 일제나 군사정권 따위의 의붓아버지 혹은 미국 같은 큰아버지가 대리했다고 보는데(441호), 부실한 정통성을 강력한 권위로 때우는 이 유사아버지는 허문영이 말한 나쁜 공동체와 다름없다. 하지만 소년이 모든 아버지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건 아니다. <태극기…>의 원빈은 홀로 남겨질 때조차 형이 떠맡던 착한 아버지로서의 ‘소년가장’ 역할을 승계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50년 뒤엔 ‘어르신’이 돼서 손녀딸의 영접을 받는다. <실미도>가 국가 자체보다 ‘나쁜 국가’를 비판한단 점은 주민등록 말소에 분개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사회적으로 공인받으려 한 고아들의 욕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장동건이나 설경구에겐 그들을 용인하고 승인해줄 공동체가 어쨌든 필요하다. 그런 공동체의 법은 소년에게 가족의 법, 가부장의 길을 내면화하도록 중층적으로 프로그램돼 있다. 그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없는 고독한 소년, 그는 이미 잠재적인 아버지다.
그래서 나쁜 아버지에게 대들다 죽는 <실미도> <태극기…>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굳이 성장영화로 묶으려면, 이때 성장은 공동체와 무관한 소년의 모험이 아니라 모험의 좌절이 은연중에 제대로 된 아버지-공동체를 희구하며 소년은 거기서 이름을 얻고 그것과 동일시되려 한다는 전제로 이해돼야 한다. 1천만 관객이 눈물을 떨어뜨린 건 이 전제가 사실 극히 소박한 가족삼각형과 평화로운 사회체제로 구성돼 있는데, 그것조차 파괴된 우리의 과거가 한스러워서일 테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공동체에 냉소한다고 한국의 소년들을 60년대 미국의 반영웅들에 빗대는 건 무리가 아닐까? 두 영화가 1천만명이나 동원한 건 반영웅을 기다린 젊은이들 덕분이 아니라, 가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하는 ‘어르신들’까지 자신들이 동일시할 비극적 영웅을 보러 극장에 왕림해서다. 진정한 반영웅은 아직 한국의 스크린을 점령한 적이 없다. 허문영은 <지구를 지켜라!>가 드물게 공동체의 영웅을 보여준다지만, 거기서 지구는 오히려 병든 엄마(노동자)에 대한 착란적 은유일 뿐이며 엄마를 착취한 건 우주적 규모로 확대된 나쁜 아버지인 자본가다. 병구는 거의 오이디푸스적 욕망으로 엄마를 망상하고 아버지를 죽이려든다. 물론 저항은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전제하기에 그 좌절은 <실미도> 못지않게 가슴 아프지만, 공동체가 오히려 소수계급의 것이고 연출도 마이너의 래디컬한 실험이었단 점은 병구를 도리어 반영웅으로 보이게 할 정도다. 그러자 흥행 성적도 끔찍했다. 병구는 확실히 너무 일찍 찾아왔던 거다.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들의 행렬
성장은 그래서 종종 씁쓸하다. 소년의 이런 비애를 가장 현실적이고 원형적으로 보여준 건 놀랍게도 여성감독인데, <질투는 나의 힘>에서 가족삼각형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회적 관계에서 확대 재생산된다. 아버지(문성근)는 아들(박해일)이 사랑하는 여자(배종옥)를 차지하고는 내주지 않는다. 아들은 여자에게 “나랑 자요, 나도 잘해요”라고 애원하지만, 아버지와 섹스하는 여자는 아들과는 키스만 한다. 아버지를 질투하던 아들의 최종선택은 당연히 금기의 수용과 권력의 계승을 통한 아버지-되기. 여자를 얻는 길도 거기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대학원생의 오이디푸스 극복기는 아버지에 대한 척력을 인력으로 바꾼 것과 다름없다. 아버지가 싫으면 아버지가 돼라! 그러니까 소년성과 관련된 모든 영화는 오이디푸스의 문제로 환원된다. <올드보이>에서 유지태의 근친상간에 금기의 잣대를 들이댄 건 최민식의 소문, 즉 언어라는 상징계의 법이다. 유지태는 이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거대한 팔루스의 탑에 기거하며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 최민식을 오이디푸스의 자리로 밀어넣는다. 최민식이 딸을 범한 건 실은 딸과 같은 나이에 죽은 유지태의 여자(누나)를 범한 것과 같다. ‘유지태―누나/딸―최민식’은 15년의 시차로 ‘아버지―어머니―아들’의 놀이를 번갈아 한 셈이다. 겉으론 누나와 딸이지만 구조적으론 아버지의 여자가 문제인 거고, 올드한 보이들은 결국 오이디푸스였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줄기찬 비판 대상인 성녀/창녀 도식도 넓게는 오이디푸스 체제의 문화적 산물이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동시에 욕망되는 무한한 베풂의 존재인 어머니는 속성상 창녀성을 내장하는데, 어머니에 대한 금지(아버지로의 귀속)는 성욕이 부인된 어머니의 신성화와 성욕이 집중될 그외 여자의 창녀화로 분화된다. 그 과정에서 성적 억압이 확대될수록 오이디푸스의 원만한 사회화는 뒤틀린 성욕의 배출로 왜곡될 소지가 크다. 허문영은 아버지의 부재로 소년의 욕망이 충분히 억압되지 못해서 여자가 성기로 환원된다지만, 실은 상징적 아버지의 거세 위협이 지나치게 강했던 게 한국사회다. <실미도>는 너무나 억압적인 체제로 인해 과격하게 일탈할 수밖에 없었던 리비도와 그 거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체제는 그것에 대항하면서 그것에 적응하고 끝내 그것을 닮아가도록 체제의 구성원들을 조련하게 마련. 남성 액션멜로물의 너무 순진하거나 너무 거친 성과 폭력은 전쟁과 독재로 얼룩진 한국사회의 마초 아버지상이 미시적인 아버지들을 통해 전수되고 습속되는 과정의 산물이다. 누구나 그 안에서 커왔던, 다른 방식의 성장이 그닥 가능하지 않았던 한국 관객에게 성장영화는 무의식적으로 어필할 충분조건을 갖췄던 거다.
페미니즘의 비판 도식에 대한 검토
반영웅의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소년들은 아버지 거부와 아버지-되기라는 오이디푸스 이중구속(double bind)의 중간 어디쯤에서 계속 패배하거나 체념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경쾌한 경우는 산뜻한 성장 에필로그를 첨부한 <품행제로>와 아버지 찾기가 성공하는 <해적, 디스코왕 되다> 정도. 그외는 <올드보이>부터 <실미도>까지, 원형적이든 국가적이든 다양한 수위의 상징적 아버지들이 소년의 길목을 가로막는다. <해적…>의 중동 근로자나 이대근 이미지는 한국 근대사의 면면들이 아버지로 호출되는 예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국영화의 소년성은 어쩌면 한국영화의 아버지성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 아버지는 부인되는 듯한 순간에도 좀더 훌륭한 아버지, 좀더 인간적인 학교, 사회, 국가를 환영처럼 비춘다. 소년은 이 아버지에서 저 아버지로 이동하면서 아버지가 되거나 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 단계를 정상적으로 극복하려는 욕망이 흔적으로나마 항상 어른거리는 것이다. 아버지 없는 세상? 그것은 소년의 상상력에 아직 포함되지 않는다.
아버지를 정말로 진지하게 심문하는 건 성장좌절영화나 성장영화가 아니라, 허문영이 예견한 ‘성인영화’들이다. <바람난 가족>은 유해와 각혈로 부서지는 부계혈통주의 앞에서 자식과 아내마저 잃는 어른의 영화다. 아버지도 없고 아버지가 될 수도 없는 홀로 남겨진 어른. 에서 아들에게 살해된 전근대적 아버지(무당)는 근대적 아버지(목사)의 상징계를 뚫고, 살해된 유아(동생의 환유)의 환영이 식탁의 빈자리를 차지하듯 망각으로부터 귀환한다. 그러자 아버지-되기를 앞둔 끝물의 오이디푸스는 죄의식에 휩싸여 진퇴양난에 빠진다. 역시 홀로 남겨진 채 숟가락을 들지도 놓지도 못하는 그는 아버지를 거부할 수도 아버지가 될 수도 없는 이중구속에 처한다. 이 두 성인 오이디푸스는 곧 오이디푸스 체제의 허점이자 구멍을 드러낸다. 중요한 건 이런 딜레마가 공통되게 남성 아닌 여성에게서 대안적으로 성찰된다는 점. 아기를 징그러운 괴물인 양 떨쳐버리는 전지현은 가족주의와 모성이 억압과 착취의 신화임을 고발하며 가족삼각형을 깬다. 물론 그런 광기는 정신병으로 몰리고, 그녀에겐 근대 가족주의를 펑크내는 투신자살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남편을 “아웃”시키며 삼각형을 이탈한 문소리는 그러나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의미있는 건, 삼각형에 종속되지도 2자 관계의 상상계를 잃지도 않은 채, 상징계의 현실 속에 살아가려고 힘차게 걸레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적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앞서, 홀로 남겨진 여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아마도 한국영화의 소년성을 극복하는 주체는 성인남성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바깥을 기획하는 여성들일 확률이 더 클 것이다.
2. 김기덕, 아버지 없는 세상으로의 이탈
아버지로부터 이탈하기 위한 분열증
그래서 바수밀다의 진심은 무시하고 육체는 착취해온 악덕 포주 여진이 남자들을 만나 돈까지 돌려주면서 감행하는 ‘바수밀다-되기’는, 내면화된 자본주의와 법으로부터 이탈하는 분열증(schizophrenia)으로도 읽힌다. 그 결과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그녀는 황진미 말대로 더이상 심판이나 용서의 대상이 아닌데, 자꾸 아버지는 자신의 법으로 구원하려드는 거다. 이 아버지는 그저 나쁜 어른을 벌주는 게 아니다. 그에게 원조교제는 (친딸은 아니라도) 아버지가 딸을 범하는 짓과 같다. 모텔 안의 딸을 처음 목격할 때 그는 딸 또래의 여자가 피살된 모텔방에 있었다(거울상의 두 모텔은 섹스와 죽음을 변주한다). 잠자는 딸을 훑어보던 시선이 암시하듯 그는 금기 파괴의 원초적 장면을 목격한 건지 모른다. 고로 여진 또래의 딸을 가진 중년남자들은 경찰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으로’ 심판되는 거다. 끝에 굳이 자수하는 것도 내가 죽인 아비와 내가 다를 바 뭐냐는 원초적 자기 처단을 깔고 있다. 돌처럼 무거운 아버지의 법이 내면화된 탓이다.
돌이 아버지의 징벌 도구이자 그의 자동차를 가로막는 방해물이란 점은 매우 김기덕답다. 전자의 돌이 기독교적이라면 후자의 돌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업보를 상징하던 돌만큼 불교적이다. 그 돌을 치워 아버지의 운명의 무게를 들어주는 자는 딸이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는 “누가 그에게서 돌을 치워줄 수 있는가?”로 바뀌는 거다. 그러니 아버지가 딸을 구원한다고만 볼 수 있을까? 그 반대라는 건 아니지만, 분열자인 딸이 아버지의 법에서 좀더 자유로운 건 사실이다. 물론 유구한 남성판타지인 바수밀다의 삶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정답도 아니듯, 여진은 빚 갚기 차원에서 한시적으로만 바수밀다가 된다. 이런 법의 이탈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는 꿈이 암시하듯 불완전하다. 그러나 아버지 없는, 아버지가 꿈꾸던 기적 없는, 금기와 죄의식과 구원의 신 없는 세계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진흙탕에서 공회전하는 아버지의 자동차를 미련없이 버리고 떠난다. 아버지를 찾아서? 아닐 테다. 그녀는 <봄 여름…>의 폐쇄회로에 갇힌 대문자 ‘인간-남자’가 아니다. 아버지의 금기에 얽매인 <장화, 홍련>의 소녀, 아버지를 벗어나려다 호수 복판에서 도닦게 된 <미소>의 처녀가 여전히 진퇴양난의 이중구속에 빠진다면, <사마리아>의 단독자는 분열증의 잠재력을 내장한 채 아버지의 법 바깥을 오간다.
오이디푸스 체제 바깥을 넘볼 수 있는 힘
페미니즘의 구속
페미니즘 비평은 당연히 되물을 것이다. 그딴 식으로 창녀-되기를 옹호하는 저의가 뭐냐고. 그러나 방점은 ‘창녀’가 아니라 ‘되기’에 찍혀야 한다. 창녀-되기는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로 거슬러 간 남성 오이디푸스가 막다른 길에서 좌초할 때, 여성에 투사된 탈오이디푸스적 분열증의 한 예일 뿐이다. 김기덕의 상상력에선 그게 유일한 예란 게 문제지만, 요는 아버지-되기만 강요된 사회에서 다른 것 되기가 가능한지 관념적으로나마 따져보는 일이다. 고로 판타지인 걸 누구나 아는데도 그것을 현실의 법정에 자꾸만 소환하는 건 텍스트를 정치적 올바름의 척도로 꽁꽁 묶어두는 일밖에 안 된다. 이보다 더 무익한 건 다른 감독도 다 그런데 왜 김기덕만 갖고 난리냐고 네거티브 전법을 쓰는 것이다. 생산적인 페미니즘 논쟁이려면 김기덕을 페미니즘적으로 긍정할 수도 있을 일말의 여지를 찾아야 한다. 금기를 건드린 <올드보이>마저 결국엔 금기의 추인으로 대중의 무의식과 호응하는 판에, 김기덕은 거기서 단절하여 거의 유일하게 아버지와 담쌓는 행보를 지속했다. 어쩌면 그는 영화판의 장정일이다(출신배경, 게릴라 기질, 사회적 논란 및 소수의 팬덤도 그렇다). 장정일의 여성관이 아무리 남성적이어도 그의 아버지 거부는 남성주의에 균열을 가하듯, 김기덕판 ‘창녀들의 저녁식사’가 어떻게 소년들의 ‘성장제일주의’를 해체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러니 제발 감독의 성별을 따지거나 평론가를 정신분석하려들지 말고, 변죽만 울리거나 개인사를 들먹이지 말고, 해봐야 서로 기분 나쁠 논쟁은 접어두고, 한국영화라는 텍스트의 무의식에 시선을 던지자. 거기선 아버지로 성장하는 소년과 아버지에게서 이탈하는 소녀가 9:1의 비율로 사회의 무의식과 접속하고 있다. 이 불균형이 어떻게 깨질지 주시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