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새로운 중세라 할 것인가? 21세기판 십자군 원정과 지하드 성전, 그리고 각양각색의 원리주의적 광신이 전세계를 횡행하는 가운데 필름으로 찍어 바친 멜 깁슨의 2500만달러짜리 헌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박스오피스를 강타했다.
지난 수개월간 영화 속의 거의 모든 내용에 대해서 태형을 당하듯 비판받아온 멜 깁슨의 이 126분짜리 참혈잔혹극은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최후의 수 시간을 영화화하고 있는데, 경건하기보다는 야단법석스런 소동에 가까워 보이고 종교적 현신(現身)이라기보다는 영화 흥행사상 흥미로운 일화의 하나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9인치 대못에 대한 설왕설래부터 프랭크 리치에 대한 살해 위협, 영화에 대한 교황의 공공연한 옹호, 그리고 올해 85살인 멜 깁슨의 아버지가 라디오 방송에서 늘어놓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반유대주의적 극언에 이르기까지, 종교영화답지 않게 백악관 특별 시사도 가지지 못한 이 영화를 둘러싼 모든 소동에 대해서 우리는 최소한 “그들은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라는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스코틀랜드의 어딘가를 연상시키는 어두운 폭풍 전야의 숲속에 유대 병사들이 예수(제임스 카비젤)를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치면서 시작된다. 예수의 용맹스러운 두 제자는 이들에 (슬로모션과 각종 효과음을 동반한 채 장렬히) 맞서 싸우고, 이 과정에서 한 병사가 베드로의 칼에 의해 한쪽 귀를 잃게 되지만 예수는 이후로 펼쳐질 격렬한 육체적 액션과 경의로운 분장술의 기적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그의 귀를 주워 다시 붙여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최근의 판타지서사물의 부류 속에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의 고대 히브리어는 <반지의 제왕> 속의 엉터리 앨프족 말처럼 들리고, 퇴폐적인 (그리고 야릇하게 중성적인) 헤롯 왕의 왕궁을 잠시 방문하는 장면은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며, 음악은 완전히 <글래디에이터>에서 따온 데다가 주야장천 등장하는 양성적 인상의 망토 뒤집어쓴 사탄은 <스타워즈> 시리즈의 편집실 바닥에서 주워붙인 것 같은 느낌이다.
영감을 준 네개의 성가를 과도하게 차용하고 있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는 유대교의 주교 카이아파스 앞에 끌려와 신성모독의 비판을 받게 되고 곧 (그리고 이후 지속적으로) 야비한 군중에게 얻어맞고, 떠밀리고 침 세례를 받는다. 비록 카이아파스가 완고하고 회의주의적인 빌라도를 설득해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데 실패하지만, 이 로마의 귀족 역시 성 안의 오크족들(?)이 예수에게 약 15분에 달하는 가혹한 태형을 가하도록 하는 데는 동의한다. 예수는 처음에는 몽둥이로, 그리고 나중에는 날을 박아넣은 채찍으로 등이 거의 포떠놓은 고깃덩어리가 될 때까지 얻어맞는데 이 장면에서 관객은 군중 사이로 어슬렁거리는 사탄과 그의 ‘미니미’(mini-me(?))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빌라도가 책임을 회피하며 자신의 손을 씻을 때, 불만에 찬 구경꾼들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외친다. 참혹하게 예수를 모략하는 이 유서 깊은 장면에서 고대 히브리어 대사가 사려 깊게도 번역 자막에서 삭제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이 영화를 반유대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명확한 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모두 의문의 여지없이 예수의 죽음 이전부터 크리스천들이었다는 점이다(그리고 오직 유다 정도만이 ‘예수를 섬긴 유대인’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폐부를 저며오는 가혹한 체벌장면을 그 정점으로, 그리고 이후로 별다른 극적인 안도감도 없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의 구질구질한 길거리를 지나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 전에 이미 극적 흥분의 반환점을 돌아버린다. 예수의 행보를 따라 가로지르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극단적인 클로즈업이 이 수난극의 소용돌이 속에 더해지지만 영화의 마지막 45분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참혹하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지점에서부터 거의 캐러멜처럼 녹아 붙은 핏자국과 카비젤의 갈라터진 피부 분장은 서서히 꾸민 티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수도 없이 반복되는 고통에 찬 마리아와 막달레나의 반응숏들 역시 호소력을 잃어가는 것이다. 치료사가 영화 크레딧에 올라 있는 것을 보면 주인공이 실제로 상당히 고통을 받았음은 분명하지만 그의 고초가 <분노의 주먹>을 찍던 당시의 로버트 드 니로의 그것만큼 대단한 것이었을지는 의문이다. 교묘하게 의도된 바대로, 영화는 죽음에 이르도록 구타와 고문을 받는 한 사내의 처참한 모습을 깊은 명상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한다. 여기서 하나의 심각한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겠는데, 과연 기독교나 천주교처럼 수난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종교적 힘의 근원을 확보하는 종교가 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마침내 고통의 긴 행렬이 끝나고 천국이 열린다. 지진이 일어나고 악마의 날개는 찢겨져나가고, 마지막 순간 예수는 건강한 구릿빛 안색으로 안식을 취한 듯 일어나 결연히 무덤을 나선다. 그리고 마치 ‘인과응보’의 시간이 다가옴을 알리듯 군대풍의 장중한 행진곡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과도하게 극화된 고통에 찬 영화 속의 장면들을 목도하면서 혹자는 십자군 원정에서 종교 재판, 식민지 원정, 노예 무역, 정치적 테러 그리고 인종 학살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통해 예수의 이름 아래 행해진 수백만의 희생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