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무림고수들의 대결, <아라한 장풍대작전>
2004-04-27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현대 도시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무림고수들의 코믹한 대결. 류승완 감독의 세 번째 액션코미디

중국의 3대 기서로 꼽히는 책으로 <봉신연의>란 작품이 있다. 우리에게 강태공으로 알려진 태공망이 무왕을 도와 600년간 존립했던 은나라를 멸하고 주왕조를 구축한 역사적 사실을 도교적 세계관으로 각색한 소설이다. 신선과 요괴와 도사가 대거 등장하는 이 책은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수많은 무협소설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류승완 감독이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저변에 깔린 사고는 <봉신연의>와 다르지 않다. 지금, 이곳 서울 도심 한복판에도 신선이 살고 있다. 다만 일반인이 모를 뿐이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그렇게 첫운을 뗀다. 누구나 한번쯤 길에서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숨가쁜 일상에서 귀담아 듣기 힘든 그 말을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액션코미디의 쾌감에 실어나른다. 여주인공 의진(윤소이)이 빌딩숲을 붕 날아오르는 순간 다가오는 짜릿한 흥분이 이 영화의 엉뚱한 상상력에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힘없는 말단 경찰 상환(류승범)이 우연히 도의 세계에 입문, 악당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수많은 액션영화가 착한 주인공과 악한의 대결을 그린 작품들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이런 기본구조를 엉뚱한 곳에서 펼친다는 점에 있다. 장풍, 경공술, 점혈, 주화입마, 공중부양 등 무협소설의 용어가 2004년 서울 한복판에서 혈겁을 불러온다. 그러기 위해 류승완 감독은 크게 두 가지 포석을 깔아둔다. 첫째, 칠선의 존재다. 태초에 7명의 도인이 있었고 그중 흑운(정두홍)이 인간계의 분쟁에 뛰어들었다가 다른 도인들에 의해 봉인됐다는 이야기다. 선계의 규율을 어기고 칼을 들었던 흑운은 선계의 최고경지에 이르는 아라한으로 가는 열쇠를 탐냈던 인물로 2004년 부활하여 아직 살아 있는 5명의 도인을 위협한다. 이것이 과거사라면 현재는 상환과 의진의 이야기다. 자운(안성기)의 딸 의진은 아라한으로 가는 열쇠를 이어받을 인물이지만 혼자로는 부족하다. 전설에 따르면 아라한은 마루치와 아라치, 두 남녀의 힘으로 지켜질 것이다. 의진이 아라치라면 상환은 마루치가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일까? 비실거리고 허둥대는 상환을 보면 믿기지 않지만 자운은 상환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발견한다.

깡패한테 맞고 다니는 순경 상환은 얼떨결에 자신의 내공을 발견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건 당연하다. 류승완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나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그랬듯 장르영화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 감독이다. <스파이더 맨> <매트릭스> <저수지의 개들> <터미네이터> 같은 할리우드영화는 물론 성룡이나 서극, 주성치 영화의 흔적을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독은 이런 영화를 자기 식으로 버무리면서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소림축구>의 전략과 유사하다. 쇠락한 소림사 고수들이 축구를 한다는 발상에서 웃음이 잉태되듯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현실에서 퇴물로, 낙오자로 인정받는 인물들에게 초능력에 가까운 힘이 있다는 전제로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고층건물에 매달려 창문을 닦는 미화원, 층층이 밥상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줌마, 짐칸 크기의 수십배되는 물건을 자전거에 싣고 가는 아저씨 등 자기 일에서 어떤 경지에 이른 인물을 모두 도인으로 보는 이 영화의 기본 전제는 훌륭한 유머가 되기 충분한 것이다. 번번이 당하며 사는 어수룩한 주인공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거듭나는 이야기도 관객의 공감을 얻기 좋은 소재다. <반칙왕>의 송강호와 전혀 다른 이미지지만 류승범은 그런 인물로 잘 어울린다. 전음입밀(일종의 텔레파시)의 수법으로 자운이 상환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 상환의 대사 같은 경우는 장내를 폭소로 몰고갈 것이다.

니자운은 흑운과의 싸움에서 내력에 손상을 입은 상환과 의진에게 기를 불어넣는다. 자운은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맺어진 마루치와 아라치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부분부분 흥미롭다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호기심을 끌 만큼 벌여놓은 이야기는 지나치게 단순해지고 액션의 쾌감도 시간이 지날수록 반감된다. 전작들에서 캐릭터의 매력을 정확히 짚어냈던 류승완의 내공도 이번 영화에서 잘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상환이 대적해야 할 악당으로 흑운을 선택한 것은 패착으로 보인다. 흑운이 누구인가? 인간계의 분란을 해결하기 위해 선계의 규율을 어긴 이단아, 혹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가 아닌가? 당연히 비애를 느껴야 할 이 인물에서 영화는 눈물 한 방울 흘릴 여지를 안 준다. 또한 굳이 애꿎은 흑운을 비난하는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다. 드라마의 병법에 따르면 궁핍한 삶을 묵묵히 버티고 있는 도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응징하는 편이 옳다.

덧붙이자면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상환이 장풍을 배우러 갔다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마지막 대결까지 상환은 장풍을 쓰지 못한다. 제목에 넣은 장풍이 허풍이었던 걸까?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그럴듯한 허풍이긴 하지만 끝내 장풍을 날리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조연배우들

안성기부터 무술감독 정두홍까지

류승완의 영화는 대체로 조연의 비중이 높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중요한 조연은 칠선의 남은 오인방 자운, 무운, 육봉, 설운, 반야가인이다. 의진의 아버지로 아라한으로 가는 열쇠를 지키는 인물 자운은 안성기가 맡았다. 극중 상환이 장풍 배우는 가격을 묻자 “그게 바람 크기에 따라 달라서”라고 말하는 대목은 안성기의 애드리브로 만든 장면. 상환을 가르치는 도장의 주인 무운으로 나온 인물은 베테랑 연극배우 윤주상. <쉬리>의 첩보국 국장, <유령>의 잠수함 함장으로 낯익다. 예전에 태권도를 배웠다는 윤주상은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젊은 배우들도 힘들어 하는 와이어액션을 선보인다. 육봉과 설운은 <피도 눈물도 없이>에 나왔던 김영인, 백찬기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빚독촉을 하러 다니는 나이든 건달로 나왔던 두 사람은 70∼80년대 액션영화에서 직접 스턴트를 하며 연기를 했던 배우들. 김영인은 <시라소니> <김두한> 등의 영화에서 이대근, 김희라 등의 대역 연기를 하기도 했으며 백찬기는 <수사반장>에서 악역을 단골로 맡아 익숙한 얼굴이다. 류승완 감독이 <피도 눈물도 없이>를 연출하며 재발견한 셈이다. 700서비스로 주역풀이를 해주며 돈을 버는 반야가인은 TV드라마로 친숙한 김지영. <행복한 장의사> <파이란> <그녀를 믿지 마세요> 등 영화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다섯명의 착한 도사들과 맞서는 흑운은 무술감독 정두홍이 맡았다. 이번에도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악역연기를 보여준다. 이 밖에 파출소장으로 임하룡, 순경으로 박윤배 등이 나오며 윤도현, 봉태규, 이춘연, 이외수 등이 카메오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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