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시골로 간 영화 <목포는 항구다> <마지막 늑대>
2004-04-28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지난 97년에 개봉되었던 <넘버.3>와 <초록물고기>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연배우 한석규와 빛나는 조연 송강호의 얼굴일 것이다. 그러나 두 영화의 공통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신인감독들(송능한, 이창동)의 입봉작이었으며, 상업적인 장르영화(이른바 ‘깡패’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사회적 리얼리즘의 정신과 장르적 화법의 행복한 조우. 이것이 그러한 평가의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04년, 우리는 그 영화들과 비슷한 장르적 성격을 지닌 두 신인감독의 영화를 극장에서 만난다. 김지훈 감독의 <목포는 항구다>와 구자홍 감독의 <마지막 늑대>. 하지만 이 두편의 영화는, 97년의 그것들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흥미로운 차이 중 하나는, 97년의 두편의 영화가 ‘상경’(上京)영화였다면, 2004년의 그 영화들은 일종의 ‘귀향’(歸鄕)영화라는 점이다.

상경영화와 대비되는 귀향영화들

97년의 <넘버.3>와 <초록물고기>는 철저한 ‘상경’(上京)의 영화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과 깡다구밖에 없는 그들에게 ‘상경’은 곧 ‘계층 상승’의 기회를 의미했다. 그들에게 서울은 기회의 땅이자,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할 처절한 생존경쟁의 무대였다. 이 영화들은 그 피비린내나는 처절한 ‘상경 투쟁’의 성공과 좌절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에게 시골(고향)은 일시적인 충전의 공간(송강호가 이끄는 불사파의 극기훈련)이거나, 성공한 뒤에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꿈의 공간(막동이의 느티나무집)이었다. 사실, 이러한 ‘상경’과 그 이면으로서의 ‘고향’의 이미지는, 이미 오래전에 한국 장르영화 속에 자리잡은 하나의 ‘공식’이기도 하다. 70년대의 호스티스물이 시골 소녀들의 좌절된 상경기였다면, 많은 범죄영화들은 시골 소년들의 무모한 상경기였다. 심지어 이미 지방 유지로 자리잡은 <가문의 영광>의 ‘조씨 일가’가 꿈꾸는 ‘가문의 영광’은 당당히 서울 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포는 항구다>와 <마지막 늑대>는 그 기나긴 전통을 거스르며 강한 ‘귀향’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이 ‘귀향’ 바람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2002년의 <집으로…>에서 시작된 고향 찾기는, 2003년의 <선생 김봉두>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들 속의 인물들이 고향을 찾아간 것은 결코 ‘자의’가 아니다. <집으로…>의 아이는 돈을 벌어야 하는 엄마에 의해 시골 외할머니에게 맡겨진다. <선생 김봉두>의 부패 교사는 실수로 시골로 전출된다. 그들은 그곳에서 진짜 ‘고향’을 발견하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되찾는다. 고향은 그렇게 오염에 찌든 그들을 순화시키는 치유력의 공간으로 이상화된다. 그러나 그곳은 그들이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 한뼘쯤 성장하고 정화된 그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울로 올라가야만 한다. 무엇보다 산골 오지였던 그곳이 이상화된 ‘과거’의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4년,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그 고향 찾기는 다시 한번 반복된다. 앞선 영화들과 다른 점은, ‘그녀’가 끝내 그 고향에 정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 사기꾼인 주영주(김하늘)의 믿을 수 없는 말과 표정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서울의 아이콘이다. 그런 그녀는 순박하고 넉넉한 시골의 인심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심을 발견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고아였던 그녀는 그곳에서 가족을 찾으며 정착한다. 그곳이 순박한 인심과 ‘고추 총각 선발’ 이벤트가 함께 공존하는 지방 소도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방도시 목포의 모호성과 매력

<목포는 항구다>는 서울 형사 이수철(조재현)의 지방 도시 목포에의 정착기라는 점에서 <그녀를 믿지 마세요>와 맥을 같이 한다. 단, 주영주는 정착을 통해 ‘신분’을 얻게 되지만, 이수철의 정착은 ‘신분’을 포기한 결과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어떻게 그리고 왜 서울 형사 이수철은 목포의 건달이 되는가? 서울 형사 이수철이 지방 도시 목포에 가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서울 검찰의 성기파 두목 백성기에 대한 어떤 ‘오해’ 때문이다. 서울 검찰과 이수철에게 목포-백성기는 철저한 오해의 대상이고, 비밀의 대상이다(백성기가 감방에서 모셨던 조태범의 추천서가 왜 거꾸로 생매장의 빌미가 되는지 그들은 끝내 알지 못한다). 둘째, 겁은 많고 운동 신경은 전혀 없는 이수철이 잠입 요원으로 선발되는 것은, 오로지 그가 가장 먼저 ‘말귀’를 알아듣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그 잠입 수사 과정에서 이수철이 백성기의 비밀(진심)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는 그만큼 백성기의 포로가 된다. 오해가 이해로 바뀌게 되면 그만큼 더 치명적인 인력으로 작용하는 법이다. ‘서울내기’를 상징하는(‘머리’는 좋고 ‘겁’은 많은) 이수철은 때묻지 않은 ‘지역성’을 간직하고 있는 성기파 두목 백성기(차인표)에게 점차 감화되며, 그리하여 백성기는 형님이 되고, 목포는 제2의 고향이 된다. 백성기에 대한 오해가 풀려가는 이 과정은, 곧 ‘목포에는 깡패만 산다’는 지역성에 대한 오해가 풀려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백성기가 보여주는 치명적인 매력은, 그 모호성과 비밀스러움(백성기에게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묘하게 공존한다)에 있으며, 그것은 곧 지방 도시 목포가 간직하고 있는 모호성과 매력이기도 하다.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백성기는 곧 건달의 도리를 지키고자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서울은 ‘사업’의 공간이고, 그곳으로의 진출은 곧 건달에서 ‘깡패’로 타락하는 길이기도 하다(어떤 의미에서 백성기는 현명하게도 자신들에게 서울의 최대치는 ‘영등포’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이수철은 제2의 고향 목포에서 형님의 도움을 통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던 ‘육체성’을 되찾으며 제2의 성장 과정을 거친다.

영화 <마지막 늑대>는 <선생 김봉두>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최철권(양동근)의 ‘귀향’ 동기는 한장의 사진이다. 그는 서울의 형사 생활을 통해 죽고 싶을 만큼 철저히 탈진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강원도 산골 마을로 귀향한다. 아마도 그는 많은 ‘귀향’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자발적 귀향’을 감행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가 무위마을에서 보여주는 행태는, 초야에 묻히기로 작정한 옛 지사나 도인의 그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그의 태도는 다양한 저항에 부딪힌다. 그곳엔 더이상 산골 오지로 남아 있고 싶어하지 않는 다양한 욕망이 있다. 먼저 여전히 서울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고정식(황정민)이 있다. 그리고 시골성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무위마을 유일의 ‘벤처 기업가’ 광수의 욕망이 있다. 고정식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만(비록 그에게도 서울은 ‘영등포’일 수밖에 없겠지만), 최철권은 온전히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도달한 결론이다. 야생의 ‘늑대’가 발견되었지만, 그렇기에 그것은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지막 늑대>는 ‘고향의 부재’에 대한 선언이 된다. 최철권은 끝내 하늘로 비약한다.

<마지막 늑대>, 고향 찾기의 종착점

일련의 ‘귀향’영화에서 인물들이 돌아간 곳은 공간적으로 시골(고향)이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어린 시절)이다. 근원적 치유력을 지니고 있으며, 다시 한번 결핍된 성장의 기회를 약속하는 그곳. 그러나 그곳은 서울(사람)의 욕망이 투사된 이상화된 타자성의 공간이고 현실적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공간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늑대>는 ‘귀향’영화들이 감행한 고향 찾기(고향의 의미에 대한 탐색) 여정의 ‘마지막’ 도달점일 것이다. 서울의 삶이 팍팍하고 힘에 부치는 것인 한, 어쩌면 그 지방-어린 시절은 한국영화(이야기)의 영원한 젖줄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영화에는 ‘맹부삼천지교’의 처절한 ‘상경’ 욕망이 들끓고 있으며, 그것이 좀더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우리 모두의 욕망이다. 그래도 한국영화가 다시 귀향해야 한다면, 이제는 더이상 ‘지방’(provincial)영화가 아니라, ‘지역’(local)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방은 서울이 ‘아닌 곳’으로서만 의미화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지역은 그 자체로 의미화될 수 있는 삶의 공간이다. 서울의 관객을 소구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관객이 자신들의 ‘지역성’(locality)을 다시금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지역’영화는, 아직 한국영화에서는 과제로 남아 있다(나는 개인적으로 곽경택 감독의 <똥개>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단지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목포는 항구다>와 <마지막 늑대>에는, ‘무거움’와 ‘가벼움’의 이상하고 어색한 공존이 있다. 새삼스러이 이상하고 어색하다고 하는 것은, 97년의 <넘버.3>에도 무거움과 가벼움의 공존이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목포는 항구다>는 감독의 누아르적 감성에서 출발한 영화이며, <마지막 늑대> 역시 감독의 ‘삐딱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영화라고 한다. 어쩌면 그 이상하고 어색한 동거는 현재의 한국영화가 지니고 있는 하나의 ‘표정’일 것이다. 대중적인 상업영화가 근본적으로 다양한 영화 주체들(제작자에서 관객에까지 이르는)의 타협의 산물이라면, 이 어색한 공존은 단지 감독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한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감독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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