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심층탐구] <효자동 이발사> 송강호
2004-05-04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송강호(37)는 변칙복서같다. 배우로서 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느껴진다. 인터뷰할 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작품‘론’과 연기‘관’에 관해서 조목조목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못 진지하게 이야기하다가는 “아니, 내가 이런 멋있는 말을”하며 특유의 큰 웃음을 떠뜨리고 뒤로 쑥 물러나 버린다. 그런데 나중에 인터뷰 수첩을 보면 마치 쪽집게 선생의 강의노트처럼 핵심정리가 돼 있는 식이다.

송강호는 게으르다

연극을 할 무렵 송강호는 연출자에게 매일 야단을 맞았다. 연기가 미숙하거나 감정 처리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대사를 외워오지 않아서”였다. <효자동 이발사> 첫 시사회를 마치고 전 스탭이 오랜만에 가진 거나한 술자리에서 임찬상 감독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송씨에게 물어봤다. “촬영 끝나고 그 긴 시간동안 뭐하고 지냈냐”고.

지방촬영이라 3개월 동안 현장에서 먹고자고 하면서도 그는 촬영현장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고, 시간날 때는 스탭들과 술만 마시는 데 도대체 연기연습은 언제 하나, 남들 잘 때 몰래 하나 하는 게 감독의 미스테리였던 것. “귀찮기도 하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도 쑥스러워서 극장에도, 비디오 가게에도 가지 않고 케이블 영화채널만 본다”는 그는 촬영현장에서도 개입하는 걸 가급적 피한다고 한다.

<효자동 이발사> 인터뷰 때 유신헌법에 대한 지식 정도나 60~70년대 사회에 관한 정치적 입장을 묻는 질문도 그는 다소 껄끄럽게 느낀다. “<살인의 추억> 때도 그랬는데 그 시대를 공부하거나 사람들을 열심히 취재해서 연기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 방식은 아니예요. 연기를 훈련이라고 한다면 저한테는 그냥 일상이예요. 평소에 가지는 세상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한 느낌같은 거죠.”

2% 비우는 여백의 힘으로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을 생각하고 영화를 보러온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 <효자동 이발사>의 주인공 성한모는 박두만처럼 입체적이거나 꽉 찬 느낌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 튀는 것으로만 말하자면 <효자동 이발사>는 그의 어떤 전작보다도 ‘약하다’. “2% 비우는 것”이 성한모를 연기하면서 그가 가장 공들였던 부분이다. “효자동은 엇박자같은 여백이 있어야 하는 영화예요. 캐릭터가 특별히 부각되면 안되죠. 카메라 앞에 서면 뭔가 하려고, 그것도 많이 하려고 하는 게 배우의 본능 같은 건데 이번엔 그걸 억누르는 게 최대 관건이었죠.”

아들 낙안이가 집에 돌아와 일어나지 못할 때 성한모는 집을 뛰쳐나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자르며 울부짖지만 이내 달려오는 차를 비척거리며 피하다가 힘없이 보도블럭에 넘어진다. “피끓는 부정을 보여주는 게 성한모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울지만 사람들로부터 ‘쟤 왜 저래’라는 반응을 받고는 픽 꺾어지고 마는 게 성한모예요.” 대통령 오찬에 초대받았다가 못볼 꼴을 당하고 아들을 업고 오거나, 대통령 영구차가 지나갈 때 화장실에서 힘을 쓰고 있는 성한모는 웃기고 가슴저리다.

“배우 송강호가 멋있게 연기하면 관객은 울겠지만 그게 옳은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효자동 이발사>가 “뭉클하기보다는 서서히 아려오는 영화가 됐으면, 장미의 강한 향보다는 풋풋한 풀내음처럼 진하지 않지만 느낌이 오래가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푸하하 웃는다. “이거 내가 한 말 맞아 아이 참 내가 했지만 멋있네. 이거”

60년대 어느날 대통령 이발사가 됐다

청와대 바로 옆 효자동에 이발소를 차린 성한모(송강호)는 4·19가 나던 60년에 아들을 낳고 아버지가 됐다. 60년대 후반 어느날, 청와대 경호실장이 찾아와 한모에게 대통령 전담 이발사를 시킨다. 군사독재 시절, 청와대라면 모두가 벌벌 기던 때에 대통령과 가까이하게 된 한모는 그러면 더 힘있는 어른이 됐을까. 말조심 해야하고, 면도하다가 대통령 얼굴에 상처내면 끝장이고, 청와대 권력자들은 그를 하인 취급하고…. 가뜩이나 소박하고 서민적인 한모는 대통령 머리를 깎은 첫날 집에 와서 끙끙 앓아 누운 뒤부터 더 서민적이고 힘없는 어른이 돼간다.

아버지라면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을,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국가가 가장 노릇을 폭력적으로 행하던 70년대에 아버지들은 얼마나 아버지다울 수 있었을까. 한모는 그 시절 보통 아버지들의 무기력함 정도를 지녔을 뿐인데 상황이 꼬여 아들을 지켜내지 못한다. 10살 짜리가 정보기관에 끌려가 한달 동안 전기고문을 받게 된다. 10살 짜리가 전기고문이라니. 참혹했던 시절, 그런 일이 없었으리란 보장이 없지만 쉽게 받아들이기도 힘든 설정이다. <효자동…>은 당시 거리 모습을 성의껏 재현하며 사실주의의 분위기로 시작하더니, 일부러 비약해 아주 도발적인 정치 우화가 돼간다.

아들이 정보기관에 끌려가게 된 사연부터 만화적이더니, 전기고문을 받는 시점에선 고문실 안에 형형색색의 전구가 빛나면서 경쾌한 음악 속에 아이는 웃고 수사관은 춤을 춘다.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이 기괴한 판타지 장면은 순간 당혹스럽다. 비극의 역설적 표현이라는 점은 금방 와닿지만, 에밀 쿠스트리차의 <언더그라운드>처럼 이런 우화는 달리 어떻게 말하기도 어렵고 그럴 필요도 없는, 모두가 다 숙지하는 참혹한 비극의 시대를 전제로 한다.

그때 대통령의 딸이 얼마전 야당 총재가 된 우리나라에서 70년대의 비극성을 모두가 받아들이는지, 아직은 더 사실적으로 짚어야할 시대인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한 구석에 남지만 이 영화의 시도는 지지하고 싶어진다.

영화는 아버지를 아버지다울 수 없게 만든 시대의 폭압성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정이 감동적일 것같은 시점이 되면 스스로 한발을 빼면서 거리를 두려한다. 결국 비겁했던 자기 모습에 대한 죄값을 치른 뒤에야 온전한 아들을 돌려받는 이 영화와, 그 얘기를 위해 우화의 틀을 빌린 영화의 형식에선 진심이 전해진다. 침묵하는 것보단 거칠더라도 저지르는 게 신인 감독들의 역할이기도 할 터. <효자동…>은 임찬상(35) 감독의 데뷔작이다. 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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