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듀나, <어린 신부>의 문근영을 염려하다
2004-05-06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문근영은 ‘귀엽다’. 요새 이 배우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귀엽다’는 표현이다. 문근영은 정말 짜증날 정도로 귀엽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배우의 동글동글한 얼굴이 스크린 위에 떠오를 때마다 마구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통통한 볼을 잡아당기면서 불쾌한 코맹맹이 소리로 “우리 그녕이 오늘 머하고 지내쪄” 따위의 유치찬란한 아기나라 말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것이다. 나 역시 그중 한명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자연인 문근영씨에게는 정말로 미안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개인적으로 미안하다고 해도, 그런 귀여움이 최근 문근영 인기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문근영은 외모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유아적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최근 활동하는 배우들 중(아역배우들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문근영만큼 완벽한 ‘귀여움’의 패키지를 제공해준 사람이 또 있던가?

귀여움과 성적 매력 사이

귀엽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며 그런 귀여움을 감상하는 것도 악취미가 아니다. 귀여움은 성적 매력만큼이나 원초적인 것으로, 우린 당연히 매스미디어를 통해 그런 매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길 바란다. 매스미디어의 특성상 그런 매력이 일부러 과장된다고 해도 그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원초적인 매력이 성적인 개념과 섞인다면 어떻게 될까? 문근영은 지금 그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 서 있다. 여전히 11살짜리 소녀와 같은 통통하고 귀여운 외모를 하고 있지만 이 배우는 지금 17살이다. 이 배우의 매력을 상품화하는 사람들은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이 귀여움의 원초적 매력을 즐기면서 위태로운 성적 코드를 제거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이 배우의 전작 <장화, 홍련>을 다시 보게 된다. 언니 역의 임수정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잦은 애무와 신체접촉은 자매 관계라는 변명을 통해 성적 코드를 제거한 뒤 관객에게 죄의식 없는 대리 충족을 제공해주려는 술수가 아니었을까?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고 넘어가자. 내 인터넷 친구들 중 문근영의 팬일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전에 출연했던 <가을동화>의 숨은 팬이기도 한 사람이 한명 있다. 그 친구에 따르면 문근영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어려진다는’ 것이다. 하긴 지금까지 이 배우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맞는 소리 같기도 하다. 적어도 <가을동화>의 어린 은서는 <어린 신부>의 볼살 통통한 보은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인다.

문근영의 팬인 그 친구는 좀더 깊이있는 관찰을 시도했는데, <가을동화>와 <명성황후>를 직접 보지 못한 나로서는 대충 그 관찰 내용을 정리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하여간 대충 이런 것이다. <가을동화>와 <명성황후>에서 문근영의 캐릭터들은 비극의 당당한 여자주인공이었다.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견뎌내고 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 캐릭터들은 드라마의 듬직한 주체였다. 하지만 이 배우가 영화로 옮겨가면서 그 위치는 슬슬 하강하기 시작한다. <연애소설>이나 <장화, 홍련>에서 문근영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보호받아야 할 나약한 대상이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이 정도면 이건 나이를 거꾸로 먹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퇴행한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이 관찰을 한 그 친구는 ‘귀여운 문근영’에 대한 내 이야기가 아주 단편적인 분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가을동화> 때부터 이 배우를 지켜본 시청자들이라면 정말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인권 감수성’이 결핍된 영화

자, 슬슬 <어린 신부>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의 내용은 다들 알고 있다. ‘죽어가는’ 할아버지의 억지 강요 때문에 16살 소녀와 24살 청년이 강제 결혼한다(나중에 봤더니 ‘나는 곧 죽네’ 하며 소란을 피웠던 영감의 소란은 손녀와 자식들을 조종하기 위한 엄살이었음이 밝혀진다. 참으로 끔찍한 인간이다). 이 어설픈 커플은 새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는데, 그러는 동안 새색시는 같은 학교 야구부 선수와 ‘불륜’을 시작한다.

아주 기초적인 것 하나. 16살 소녀가 강제 결혼당한다는 이야기는 “아, 아직도 그런 일이 일어나나? 하하하” 하고 웃어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 식의 강제 결혼이 이전처럼 잦지 않은 건 그것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가부장제의 억압 어쩌고저쩌고’로 막연하게 표현되는 추상적인 잡담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분명한 인권 침해이다. 생각해보라. 아직 제대로 머리도 굳지 못한 아이의 인생을 남이 멋대로 정하는 게 올바른 일인가? 이런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직 우리가 후진국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적어도 정상적인 ‘인권 감수성’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강제 결혼’이라는 소재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척이라도 해야 마땅하다.

물론 이런 소재도 괜찮게 다루는 방법이 있다. <어린 신부>의 경우도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주인공 보은이 결혼한 뒤에 맨 처음 하는 것이 그런 어른들의 결정에 반항하는 것이다. 보은은 신혼여행도 가지 않고 남편을 놔둔 채 남자친구를 사귄다. 이건 아주 건강한 반항이다. 남편인 상민도 조금 성의있게 다루었다면 괜찮은 인물이 될 수도 있었다. 괜히 16살배기 ‘아내’를 다양한 방법으로 성희롱하는 대신 그 말도 안 되는 집안 약속 따위는 잊고 아이를 풀어줄 방법을 찾기라도 했다면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소재로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엔 그 정도의 성의도 없다. 영화 끝에서 보은과 상민은 온갖 수난을 극복하고 ‘맺어진다’. 결국 결말에 가면 모두들 ‘선견지명 넘치는’ 할아버지의 결정을 찬양하고 둘은 영화 도입부에 그들을 가두었던 감옥에 주저앉는다. 쓰다보니 마치 좀비영화 줄거리를 읊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아니, <어린 신부>는 정말 좀비영화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작품이 해머영화였다면 두 주인공이 불타는 저택 안에서 좀비 두목인 할아버지의 머리를 장검으로 날려버리며 끝났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그게 더 이치에 맞는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그럴싸한 물건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이 영화가 전적으로 문근영과 김래원이라는 두 스타의 매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근영이 그렇다. 김래원이 꽤 큰 비중으로 나오긴 하지만 <어린 신부>는 문근영의 영화이다.

캐릭터를 타자화시키는 문근영쇼

다시 문근영의 ‘귀여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이 배우의 귀여움은 이 영화에서 두 가지로 기능한다. 첫째, 관객을 매료시키고, 둘째, 그러는 동안 관객을 마비시킨다.

귀여움이란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건 몇억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니 괜히 이유를 따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귀여운 대상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섹스 파트너를 고를 때는 힘겨운 선택이 필요하지만 정작 자신이 낳은 아기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까.

<어린 신부>에서도 문근영의 귀여움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어린 신부>를 보러 극장에 들어간 대부분의 관객의 머리는 그렇게 빨리 돌아가지 않는다. 경계를 하기엔 문근영쇼의 비중이 너무 크고 그것의 영향력은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그냥 멍하고 기분좋은 상태로 극장을 떠난다. 마치 너무너무 귀엽지만 정작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조카들과 하루를 보낸 기분이랄까.

이런 귀여움은 보은의 캐릭터에도 손해이다. 귀여움을 강화시키려면 캐릭터는 어쩔 수 없이 주체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귀여움은 캐릭터의 타자화와 연결된다. 그 대상을 보는 관객은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동화되는 대신 밖에서 구경하며 소유하게 된다. 결국 문근영쇼는 관객으로부터 캐릭터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게 된다.

나는 <어린 신부>의 미래에는 별 관심이 없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이 영화는 몇몇 배우들의 필모그래피에 작은 상처만 남긴 작은 영화가 되어 잊혀질 것이다. 아마 미래의 몇몇 학자들에게는 역사적 자료가 될지도 모른다. ‘부모 동의하에’ 16살 여성이 결혼할 수 있게 한 법률은 곧 사라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문근영의 미래에는 관심이 있다. 나는 이 젊은 배우가 앞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살려줄 만한 좋은 영화들을 만나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하길 바란다. 나는 이 배우가 이 어마어마한 귀여움을 접어두고(물론 나는 분명 아쉬워할 것이다) 진지한 성인배우로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길 바란다. 그리고 미래의 누군가가 “<어린 신부>를 찍을 때 당신 뇌를 어디다 두고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바바렐라> 출연에 대해 같은 질문을 들은 제인 폰다처럼 “글쎄요. 아마 겨드랑이 어디쯤?”이라고 가볍게 대답하고 웃어주길 바란다. <어린 신부>와 같은 영화들을 연달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런 미래는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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