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시스템에 영혼을 팔지 말라, 배우 윤주상
2004-05-13
글 : 오정연
사진 : 정진환

연극배우 윤주상이 무대에 등장했다.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형극장이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던 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반면 <아라한 장풍대작전>과 <효자동 이발사>를 보고 그가 연기한 ‘무운’과 ‘쌀집아저씨’가 동일 인물임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그가 영화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지는 10년. <태백산맥> <쉬리> <유령> <킬러들의 수다> 등 필모그래피도 제법 화려하다. 그런 그를 관객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평범한 외모 때문이 아니라 띄엄띄엄 그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긴 간격들은, 연극 무대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달리 깊고 진했다는 것, 그리고 젊은 배우를 편애하는 충무로의 풍토가 길게 이어져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윤주상은 34년 동안 150여편의 연극에 출연했지만, 영화 출연작은 10편 안팎에 머문다. 그는 요즘 영화를 좀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한다. “젊었을 때는 연극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역시 연극 못지않은 깊이를 지닌 전문적인 영역이지 않나. 그래서 매력적이다.” 배우로서 또 다른 재미를 놓쳐왔다는 이야기.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싶은 배우로서, 영화계에 대한 바람도 잊지 않는다. “연극은 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지만 영화는 언제나 젊은 얼굴을 원한다. 영화도 연극처럼 관객의 폭이 넓어지면 나도 비중있는 역할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영화들에서 그런 경향이 엿보여서 기대가 된다.”

연륜이 준 선물인지, 연기에 대한 그의 철학은 근사하게 들린다. “작은 배역은 없다. 영화 속의 모든 인물에게는 자기만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겐 처음으로 관객에게 자신을 인지시킨 <유령>의 함장에서 최근 연기한 역할에 이르기까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는 생전 처음 와이어액션을 소화하면서 영화의 무게감을 실어주는 무운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안성기와 함께 특별훈련까지 받아가며 노력한 끝에 정두홍 무술감독에게 ‘제법’이라는 칭찬까지 들었다면서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효자동 이발사>의 쌀집아저씨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소시민으로, 큰 소리로 앞에 나서서 떠들어도 정작 가장 공허한 사람”이라면서 애착을 보인다.

“무대에서는 내가 제왕이라고 생각한다”는 윤주상. 혹시 오늘날 영화계 후배들의 가벼움을 우려하고 있지 않을까. ‘제왕’의 품위는 후배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배우는 첫째로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만약’이라는 가정법 속에 자신을 옮겨넣으면서 자신의 정서적인 폭을 넓혀야 한다. 연기력은 그 다음의 문제다.” 실제로 그는 모두가 알 만한 젊은 영화배우에게 짧게나마 발성과 연기를 가르친 적도 있다. 그가 보는 문제점은 개개인의 가능성과 의욕 부족이 아니라 “배우의 영혼을 갉아먹는” 연예계의 시스템. 후배를 혹사하는 매니저에게, “니가 문제야”라며 직설적으로 말한 적도 있다.

그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목소리를 얻게 된 것은 두번의 계기 때문이다. 첫 공연 이후, “대사 전달도 안 된다”는 가혹한 평가를 받은 뒤, 발성법과 화술, 구문법까지 목소리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고 그로 인해 배우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십여년 뒤. 성대수술을 해야 할 만큼 커다란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치료과정을 통해 결국 본래 자신의 음역을 넓힐 수 있었다. 이처럼 장애를 기회로 바꾸어낸 그는 앞으로도 “나이에 구속되지 않는, 늘 준비된 배우”가 되길 희망한다. “늦기 전에 내 영혼이 담길 만한 영화를 찍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는 그 깊은 목소리처럼, 세월따라 그의 역량도 더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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