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만든 감독이나 영화제를 취재하려는 기자나 깐느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서류상의 형식적인 절차는 말할 것도 없고, 극장에 들어가기도 까다로운 권위적인 깐느에서 주눅들지 않는 사람은 딱 한명인 것 같다. 두번째 영화 <펄프 픽션>으로 황금종려상을 ‘가볍게’ 거머쥐고 정확히 10년만에 심사위원장으로 깐느로 돌아온 쿠엔틴 타란티노(41)다. 손짓까지 섞어가며 수다스러운 말투로 심사위원단 기자회견에서 시종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 그는 “<킬 빌 2>가 경쟁부문에 진출해 상을 타는 것이 심사위원장을 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노! 노! 노!”라고 세번이나 크게 외치고는 “나는 지금 천국에 와있는 기분”이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깐느는 천국 같은 곳이다. 첫 영화를 만들 때 나의 꿈은 깐느에 진출하는 것이었고, <저수지의 개들>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다. 그 다음 꿈은 레드 카펫을 밟는 것이었고, <펄프 픽션>으로 그 꿈을 이뤘다. 그 다음의 꿈은 심사위원장이 되는 것이었고, 올해 그 꿈을 이뤘다. 어떻게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는 <저수지의 개들>로 칸에 왔을 때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무작정 보러 들어가려다가 진행요원들에게 저지를 당하자 “막강 로스엔젤레스 경찰이 지키고 있는 로스엔젤레스 출신답게 육탄전을 벌였던 적도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홍콩 무협영화나 일본 사무라이 영화 등 아시아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이 심사를 하는데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에 “편견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라며 “개인적인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도 클 것이기 때문에 취향이 심사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타란티노의 탈권위적인 태도 때문인지 기자회견장에서 심사위원들 사이에 가벼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국 바깥의 영화시장이 할리우드에 잠식당하는 현실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그가 “사람들은 스타를 보기 위해 돈을 내기 때문에 미국이나 인도·홍콩처럼 스타시스템이 존재해야 영화산업이 설 수 있다”고 말하자, 다른 심사위원인 영국 배우 틸다 스윈튼(<올란도> 주인공)이 정색을 하며 “모든 영화문화가 그런 식의 할리우드 시스템을 닮아갈 필요가 있는가. 도리어 다른 나라들이 할리우드 시스템을 닮아감에 따라, 새로운 영화를 만들거나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타란티노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할리우드가 나쁜 놈(배드 가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며 “그래도 세계 어디에나 작은 영화들이 상영되는 곳은 있지 않은가”라고 궁색한 변명을 하기도 했다.
“현기증이 날 만큼 높은 곳에 서 있는 것 같다. 떨리고 흥분된다.” 최근 몇년간 깐느의 개막작 가운데 작품의 질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영화로 평가받은 <나쁜 교육>의 페드로 알모도바르(53) 감독은 “수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칸의 개막작으로 선택받아 이 자리에 오게 된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상처럼 느껴진다”고 기자회견의 말문을 열었다.
<나쁜 교육>은 알모도바르의 영화 가운데 개인적 체험이 가장 많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그는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소년 시절 엄격한 가톨릭 기숙학교에 다녔고, 합창단의 솔로로 노래하기도 했으며, “죄책감과 처벌에 대한 공포를 배우며 성장했다”고 회고했다. 학교에 다닐 무렵 이미 “종교나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그는 이 영화가 반종교적이라는 견해에 대해 “신보다 성물같은 상징물을 숭배하면서 요즘의 기독교, 특히나 스페인의 가톨릭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영화를 통해 종교에 반기를 들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다.
<나쁜 교육>은 알모도바르에게 칸영화제 감독상을 안긴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이나 <그녀에게>(2001)처럼 비극적인 멜로드라마를 그리고 있지만, 그보다 어둡고 강렬하다. “나는 누아르 영화의 숭배자라고 말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누아르 영화와 감독들을 열거하며 “누아르는 현실의 삶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매혹됐다. 누아르 영화에서 살인은 하나의 죽음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마음 속에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끓어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그 분위기와 형식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미 명망가 감독 대열에 들어선 지 오래인 알모도바르도 관객들의 반응은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시사회가 끝나고 나오는 기자들에게 어떻게 봤는지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는 그는 “<나쁜 교육>은 긴 호흡으로 소화해야 할 영화인데,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안다”며 “극장에 흐르는 침묵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내 영화가 상영될 때의 침묵이 지루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애교섞인 바램을 밝히기도 했다. 깐느영화제 상영작 가운데 첫 기자회견인 탓도 있었겠지만, 빽빽하게 자리를 메운 회견장에서 쏟아지는 질문마다 길게 답변한 알모도바르는 회견장을 나온 뒤에도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을 마다하지 않는 정성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