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기자회견의 황금 좌석들은 일찌감치 도착한 한국기자들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었다. 뒤늦게 들어온 외국 기자들에게는 기이하게 비추어 졌을 광경, 아니나 다를까 다들 만면의 미소를 채우고 한국 기자들을 쳐다보며 기자 회견장으로 입장했다. 한국 기자단들의 암묵적인 법칙이 ‘외국 기자들에게 질문 기회를 양보하자’이기라도 한 듯. 한국기자들의 눈과 귀는 프랑스어와 영어로 호기심 가득한 질문들을 앞다투어 하는 외국 기자들에게 온통 쏠려있었다.
재치있는 질문들에 박찬욱 감독은 예의 그 장난스러운 얼굴로 조리있고 재미있는 답변들을 쏟아내었고 기자 회견이 끝난 이후에도 그의 답변들이 각 잡지들의 데일리와 방송들에 반복적으로 소개가 되어졌다. 특히나 스크린 인터내셔널은 ‘올드 보이가 한국에서 빌을 죽이다(Old boy kills bill in South Korea)’라는 재기넘치는 제목을 달고 칸 영화제에서의 <올드보이> 센세이션을 소개하기도 했다.
기자 회견에서 질문을 던지던 어느 외국 기자의 표현처럼 <올드보이>는 ‘경쟁부문의 첫번째 충격적인 물결(the first shock wave in the competition)’로 칸 영화제의 관심이 이처럼 집중되고 있는 중이다. 한편 각국 기자들과 평론가들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나누어 지고 있는 상황. 매일매일 데일리를 편찬하는 미국 잡지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평점은 2.4점으로 현재까지 공개된 경쟁작 6편중 2번째로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첫번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프랑스 영화잡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를 위시한 4개의 프랑스 언론은 평점없는 소위 ‘폭탄’을 <올드보이>에 안겨주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각국 기자들의 의견도 “내 인생 최고의 영화중 하나였다. 판타스틱하다(루이 페드로 테니이나 –포르투갈의 프리미엄 TV-)”라는 찬사와 “지나치게 과시하는 스타일에 함몰되어 있는데다가 스토리가 반복적으로 늘어진다(제레미 매튜스-데일리 유타 크로니클)”라는 평가로 양분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올드보이>가 이 권위로 가득찬 오래된 영화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격론의 재미를 안겨주고 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일본 만화가 원작이라고 들었는데, 이 영화에서 원작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만화를 원작으로 해서 영화를 만들면 구도 같은 것이 이미 다 완성되어 있는 상태여서 더 쉬울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영화와 만화는 다른 매체니까 서로 취할 것이 없었다. <엑스맨>이라면 의상이라도 참고 했을텐데.
건물 복도의 장도리 액션 씬이 인상적이다▶복잡하고 낡은 배관이 많은 좁은 장소에 세트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 20여명과 싸우려면 좁은 공간이라야 배치가 가능하니까. 원래는 수백개의 샷을 이용해 만화적인 액션장면을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촬영이 들어가기 전에, 활력과 만화적 쾌감을 살리기 보다는 오대수의 고독감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한 포인트가 될것이라고 생각해서 바꾼것이다.
(최민식에게) 어떤 상태로 영화에 몰입하고, 거기에서 빠져 나왔는가▶15년의 감금생활을 했던 사람의 외형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준비과정이 길었다. 감금 이후의 복수의 과정에서 보여지는 오대수의 모습을 위해 체중감량을 했고 육체적인 스트레스와 인고의 세월을 표현하기 위해 권투를 연습했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만화도 보았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라고 생각했다. 작품을 전략적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내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들어오면 바로 돌진할 준비가 되어있다. 빠져나오는 건, 뭐 영화를 마치면 언제나 감독과 술을 마시지(웃음).
영화속의 폭력이 흥미로운데▶폭력적인 부분이 이유없이 쓰이진 않았고 육체적인 폭력보다는 심리적인 폭력성을 나타내고 싶었다. 물론 볼거리로서의 폭력, 몸의 움직임이 주는 활력과 그로부터 얻어지는 쾌감 같은 폭력의 유희적 느낌을 좋아한다. 그러나 폭력의 아름다움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폭력이 드러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재미있으나 그것을 재미로 만드는 것에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폭력의 결과가 무엇인지,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하는 문제이다.
<올드보이>는 복수 삼부작의 2번째 영화이다. <복수는 나의것>과 이번 영화의 스타일이 많이 다른데, 3부작의 마지막 편은 어떻게 만들 예정인가▶<복수는 나의것>은 건조하고 차가운 영화이고 <올드보이>는 더 습하고 뜨거운 영화다. 3편의 각본은 이제 막 쓰기 시작한 단계라 뭐라 할말이 없다.
미국에서 리메이크를 계획중이라고 들었다. 어떤식으로든 참가할 예정이 있는가, 희망사항이 있다면▶내 영화의 스토리가 미국에 팔려나가 리메이크 되는 것은, 내 영화가 수출되어 그나라에서 그대로 개봉하는 것에 비하면 별로 재미가 없는 일이다. 사실 리메이크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아주 뛰어난 감독이 리메이크를 내 영화보다 더 뛰어나게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웃음)
현재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해서는 참석자 모두 답변을 해달라▶(박찬욱)한국영화 산업의 특징은 예술적으로 우수한 작품이 대중의 외면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최민식)국위선양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창작의 자유가 구속을 받았던 시기가 있었고, 그것을 벗어난 90년대 중반부터 그 권위에 억눌려 있던 인재들이 비로소 봄의 개구리처럼 튀어 나와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것이 한국 영화 산업의 원동력이다.
▶(강혜정)한국 영화는 좋은 시기를 맞이했다. 좋은 시기가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좋은 시기가 마침내 성장을 시작했다라고 생각한다.
▶(유지태)한국 영화가 발전하면서 대기업의 자본들도 많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나의 바람은 그런 성장속에서 체계가 잘 잡혀나가서 독립 영화와 B급 영화까지 배급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청청훈)관객들에게 한국영화가 외면받던 시기가 있었다. 배급력을 탓할 수는 없었다. 좋은 기술로 좋은 영화를 만들면 한국 영화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두 캐릭터가 동창으로 설정되어 있음에도 나이 차가 별로 나 보이지 않는다.▶이우진 캐릭터는 누나의 죽음으로부터 받은 충격으로 성장이 멈추어 버린 것처럼 설정 되어졌다. 그래서 젊어보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보톡스를 맞는 것으로 설정하려고도 했다.(웃음) 사실 한국에서는 나이와 서열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젊은 사람이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을 가지고 놀고 조롱하는 것은 한국 관객에게 굉장히 흥미로울 수 있다.
(강혜정에게 질문)감독이 당신에게 어떠한 것을 요구했나▶”공간에 익숙해지라”라는 말을 했다. 감독에게 그게 무슨말이냐고 물어보니 2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더라. 첫번째는, 내가 연기 경험이 많이 않기 때문에 연기하는 공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자기 집과 남의 집에서 행동하는 것은 다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두번째는, 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지어진 세트는 내부 공간이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촬영전에 그 공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어떤 영화들로부터 ‘복수’라는 주제로 영화를 만드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나. <킬빌>?▶<킬빌>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복수라는 주제는 고대 신화나 그리스 비극에서 현대 영화까지 변함없이 즐겨 다루어진 소재이다. 내가 복수 3부작을 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사적인 보복’이라는 것이 금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기에 도전하는 것은 예술가의 특권이니까. 사실 한국에서 <킬빌>은 <올드보이>와 동시에 개봉하는 바람에 흥행에 성공할 수 없었다.
미술과 촬영이 훌륭하다. 특히 디지털 카메라로 작업한 장면들. 현재 한국의 디지털 영화 상황은 어느정도인가▶사실 이 영화에 디지털로 찍은 장면은 없다. 부분적으로 컴퓨터 스캐닝으로 디지털 색보정을 했다. 그렇게 눅눅하고 아련한 회상장면을 창조하고 싶었다. CG분량이 꽤 많은 편인데 한국 CG의 수준은 굉장히 높다.
뉴질랜드에서 찍은 장면도 있다. 상당히 큰 자본의 영화인 것 같은데 어떻게 제작비를 끌어들였나▶뉴질랜드 장면은 사실 뉴질랜드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저 겨울 장면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대부분의 영화 장면들과는 다른 느낌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한국영화로서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