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불어라 높새바람, <하류인생>의 김민선
2004-05-27
글 : 박혜명
사진 : 정진환

“풀숏인가요?” 조명기 앞에 선 김민선이 대뜸 어른스런 투로 질문한다. “아니오, 여기까지 나와요”라고 사진기자가 무릎 근처를 짚어주자 알겠다는 듯 바로 대범하고도 드라마틱하게 포즈를 취한다. 하늘거리는 스커트 차림의 그가 가느다란 팔다리를 이리저리 자연스레 흔들어보다 다시 묻는다. “바람 없어요?” 선풍기가 있는데 고장났다는 말을 듣고 포기하려는 찰나, 스타일리스트가 조명기 옆으로 커다란 스티로폼판을 들고와 부채 삼아 부쳐준다. 불규칙하지만 인공적이지 않은 바람이 그의 주변으로 일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몸을 묻듯, 김민선은 아까보다 더 날아갈 듯한 동작으로 움직인다.

이런 거리낌없는 김민선의 모습은 사실 낯설지 않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드라마 <유리구두> <현정아 사랑해> 등에서 보인 당돌함과 발랄함이 그의 똑 부러진 외모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은 이런 그의 이미지를 조금 어긋난 각도에서 비춘다. <하류인생>에서 흐르는 것은 강하지만 물러설 줄 알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한없이 인내할 줄 아는 박혜옥의 넓은 품새다. “단순, 무식, 과격”한 최태웅의 순수함 하나를 믿고 결혼을 결심할 만큼 대담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 당당한 자신감의 소유자라는 점은 통하지만, 모 가수의 뮤직비디오에서 현란한 춤 실력을 과시하던 김민선은 없다. 피자를 맛있게 베어물며 생긋 웃는 귀여움도 없다.

“감독님이 캐스팅을 제안하셨을 때 사실 의아해했어요. 저에 대해 어떤 걸 기대한다는 말씀 같은 건 없었어요. 저도 기사를 보고 알았어요(임권택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김민선이 “찍기에 따라 대단한 매력을 뽑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저는 알고 있었어요. 사실 저는 느낌을 많이 가지고 있는 배우예요. 굉장히 감성적이고요. 영화나 드라마가 워낙 타입캐스팅이 많은지라 여태까지는 그것의 일부만 보여졌던 거죠. 그래서 감사했죠. 저한테서 잠깐 드러난 이미지를 감독님이 캐치하고 믿어주신 게.”

자신의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자 주변에서 “김민선이 왜?”라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류인생>을 만나기 전까지 쌓아두었던 답답함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일 텐데. 하지만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인물을, 얼마만큼의 폭을, 얼마만큼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어두운 데서 형광등이 반짝 켜지는 것처럼” 깨달아갔다.

김민선은 끊임없이 감독에게 질문했다. 감독이 읊은 말들로 현장에서 쓰여지는 시나리오의 대사는 “너무 문어체이고 요즘 쓰는 말이 아니어서” 바꾸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시나리오가 없으니 콘티조차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현장에서, 그는 지금 이 장면이 클로즈업인지 바스트숏인지를, 언제쯤 테이크가 끊기는지를 지겹도록 꼼꼼하게 묻고 계산했다. 감독님이 바빠보일 땐 눈치껏 리허설 필름을 보며 감을 잡았다. 상황에 대한 단서를 “툭, 툭, 툭, 툭” 던지시는 감독님의 말을 빠짐없이 “경청했다”. 스쳐지나가는 말을 붙들고 “그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수십번 곱씹었다. “많이 배웠죠. 그분의 에너지도 많이 받았고. 제가 드려야지, 했었던 건데.” 에너지의 수혜자가 성숙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성숙함. 그에게 낯설어 보이는 이 단어는 그러나 그의 것이다. 인터뷰에 응하는 김민선의 태도는 능구렁이란 표현이 어울릴 만큼 노련해 보인다. 설명적인 어조와 상황묘사에 애쓰는 손짓, 순간순간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려는 표정까지. 그는 “자신감이 원체 없던 사람이라” 상대방의 얘기를 주로 들으며 자기가 해야 할 말을 소심하게 마음속으로만 재던 아이였고, 겨우 할말을 생각해놓으면 말할 타이밍을 놓쳐 마음에 후회만 쌓아오던 아이였다. 행여 말을 버벅거리면 아이들이 비웃을까봐 발표 한번 제대로 못하면서도, “못하면 또 튀니까” 교실 구석에 처박혀 자기 것만은 열심히 끼적댔더랬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소풍 장기자랑 때, 맨 앞줄에 앉았단 이유로 반 대표로 불려나가 막춤을 추고 난 뒤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참여하는 것이 창피하고 후회되면서도 오히려 맘은 편하더라”는 걸 알았다. 그뒤로 매년 한번씩 친구들과 팀을 짜서 춤연습을 하고 아이들 앞에 선보였다.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던 자신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깨닫는 순간 성숙한다. 임권택 감독이 잡아낸 김민선의 결도 이것이었으리라. 어머니의 삼일장을 치른 이틀 뒤부터 시작된 촬영현장에 깊이 파묻혔던 그가, 이제 <아프리카> <스물넷>을 선택했을 때에는 없던 책임감과 부담감을 지고 몸을 일으킨다. “빨리 일하고 싶다는 의욕부터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되돌려줄 무언가를 갖춰야겠다는 다짐. 이 다짐은 “바람이 있으면 몸을 움직이기가 더 쉬워요. 저는 느낌이 있는 사진을 찍고 싶거든요”라고 말하는 자유로운 감성과 함께 또 한번 성숙의 기회를 맞을 것이다. <하류인생>으로 삶의 터닝포인트를 발견한 스물다섯의 김민선은 그것을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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