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경비구역 JSA>의 한국영화 흥행기록 경신, <복수는 나의 것>의 비평적 찬사, 상업영화의 룰을 깬 <올드 보이>의 흥행성공과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박찬욱(41)은 그야말로 ‘흥행과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쥔 ‘희귀한’ 감독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거장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도 아니고, 거장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아직 나이는 젊고 할 일은 많은 감독이다.
칸영화제에서 싸들고 온 박수와 찬사의 짐을 미처 풀기도 전에 그는 최근 촬영을 끝낸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의 후반작업을 시작했고, 칸에서도 바쁜 일정 가운데 짬짬이 쓰다가 돌아온 <친절한 금자씨>(가제)의 시나리오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 국내 시사회 당시 “또 복수냐”는 기자들의 반복되는 질문에 홧김에 “복수 3부작을 만들겠다”고 호언하면서 정말로 3부작이 돼 버린 복수시리즈의 마지막편이다.
복수극보다는 속죄의 드라마가 강조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영애. 칸에서 돌아온 직후인 26일 캐스팅이 확정됐다. 주인공이 정해진 마당에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져야 한다. 또한 칸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할리우드로부터의 러브콜은 그가 고민해야 하는 여러가지 과제 중의 하나로 덧붙여졌다.
이 모든 찬사와 분주함은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상한 상업영화’ <올드보이>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그가 오늘, 한국영화의 가장 예외적인 자리에 앉게 되기까지의 시간, 인간 박찬욱과 감독 박찬욱이 걸어온 길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본다.
미술사학자를 꿈꾸던 착실한 모범생, 영화를 만나다.
좋은 예술가들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다는 데 난 그런 게 없어요. 작품에 서정성이 부족한 이유가 그래서인가(웃음)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문화적인 환경에서 자란 편이었죠. 부모 양가가 5대째 서울에서 산 서울 토박이였고.(박 감독의 아버지는 건축과 교수였던 박돈서 전 아주대 공대 학장이며, 큰 아버지는 박승서 전 대한변협 회장이다.)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 전시회를 많이 다녔던 기억이 나요. 친가가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것같은데 그 재능은 동생(박찬경씨는 화가 겸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이 더 이어받았고.
10대땐 영화보다 미술에 빠져 친구따라 극장 순례 공부 접어
그에 비하면 영화는 별로 많이 보러 다니지 않았어요.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를 자주 봤고 극장에서 봤던 영화는 007시리즈가 생각나네요. 그걸 보고 초등학생때 콘티 북처럼 스토리를 만들어서 공상하고 그랬어요. 반면 무협영화는 거의 안 봤어요. 장철이 누군지도 몰랐고, 이소룡 영화도 <용쟁호투>만 봤으니까. 그땐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엘 그레코나 카라바치오, 고야, 주세페 디 리베라 같은 화가들의 그림에 푹 빠졌죠. 고문받는 사람들이라든나 화살에 온몸이 수십바늘 찔리는 순교화라든가, 그로테스크하고 드라마틱한 면에 매료됐던 것같아요. 그 영향은 지금 내 영화와 연결되는 지점이 분명 있지요.
그런데 실기에는 재능이 빼어나질 않아서 미술사학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철학과를 선택했어요. 성적이요 의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권유로 이과에 갔다가 도저히 적성에 안맞아서 고3때 문과로 옮겼어요. 착실한 모범생이 그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한 건데(웃음), 제일 친했던 친구가 영화를 좋아해서 그 친구의 인도 아래 의정부까지 영화보러 다니느라 공부는 아예 접었죠. 그때부터 영화광이 됐지만 영화과 진학을 하지 않은 이유는 엄두가 안나더라고요. 영화는 터프가이들만 하는 건 줄 알았죠. (웃음)
대학시절 <현기증>과 데모대 사이에서 현기증을 느끼다
고등학교가 악몽같아서 대학진학은 해방 그 자체였지요. 머리도 기르고 옷도 별나게 입고 다녔어요. 검은 터틀넥 스웨터에 두꺼운 은목걸이하고, 오스카 와일드 책 들고 다니고. 그런데 학생 운동이 치열하던 그때 한 학기 다녀보니까 분위기가 이게 아닌 거에요. 그때부터는 교련복만 입고 다녔어요. (웃음) 그래도 운동하던 선배들에게 이미 찍혀서 나를 제껴놓더라구요. 그때가 가장 충격이 컸어요.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운동하는 서클에 들어갔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다가 내가 가면 다른 이야를 하고. 같이 해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진짜 고독했죠.
서강대 도서관에 영화원서가 많은 편이었는데 책을 빌리면 도서카드에 언제나 몇명의 이름이 반복해 등장했죠. 문과대 바닥이 좁으니까 금방 사귀게 됐고, 이 친구들 통해서 정성일, 강한섭, 전양준, 김소영 같은 선배들을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학교에 영화동아리를 만드는데 참여했어요. 원서강독하고 문화원 다니면서 정성일, 전양준 선배의 구라에 많이 놀아나고(웃음), 유학가 있는 김홍준이라는 천재가 한국영화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듣고. 그때 쯤 <영화언어>라는 비평지가 창간됐는데 가서 잔심부름도 하고 그랬죠.
감독이 되기로 결심을 한 것도 그때였어요. 한 신부 교수님이 영화를 좋아해서 소장비디오로 정기 상영회를 열었는데 그때 히치콕의 <현기증>을 보면서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쫓는 미행장면이나 여자가 미술관에 가서 죽은 여인의 초상화를 보는 장면에 넋이 나갔죠. 또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라면을 먹으러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같은 영화를 본 지금의 아내(김은희), 그때는 이대생이었는데, 를 친구한테 소개받은 거예요. <현기증>은 여러모로 제 인생의 영화가 된 셈이지요. 그런데 그때는 조직에 몸담고 있지 않았어도 모두가 돌을 던지던 시기라 저 역시 맨날 그러고 살았어요. 이쪽 가서는 최루탄에 도망다니고, 저쪽 가서는 히치콕에 열광하는 게 혼란스러웠죠.
저예산 B급에 열광 또 쓴잔, 시나리오 들고 영화사 전전 데뷔에서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졸업하자마자 선배들한테 부탁해서 이장호 감독의 제작사(판 영화사) 연출부 막내로 들어갔어요. 유영진 감독의 <깜동>이라는 영화였는데 세컨드가 곽재용 감독, 막내가 저였죠. 그 연으로 곽 감독의 데뷔작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조감독을 했죠. 그런데 독립영화처럼 찍던 <비오는…>의 현장이 너무 힘들어서 촬영이 끝날 때쯤에 제가 뛰쳐나왔어요. 그때 영화를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생각해놓은 스토리가 있어서 각본이라도 써보고 그만 둬야겠다 싶더라구요. 노조파괴전문가인 제임스 리를 모델로 쓴 하드보일드 미스테리였는데 다 쓰고 보니까 마음에 드는 거예요. ‘이런 재능을 썩히면 한국영화에 큰 손실이다’라고 혼자 생각하고는(웃음) 어떻게든 다시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죠.
그리곤 구멍가게만한 영화수입사에 취직을 했어요. 돈 모으면 영화 찍게 해준다는 말에 혹했죠. 외화 고르고, 자막번역하고, 보도자료 쓰고 온갖 잡일 다 했죠. 심지어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빈센트>가 길어서 극장에서 잘라달고 했을 땐 그 영화 편집까지 했어요. 누군가 저질러야 할 범죄라면 업자보다는 그래도 내가 하는 게 낳을 것같다고 생각한 거죠. 돈이 좀 모이니까 대표가 약속을 지켜줘서 첫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을 찍게 됐죠. 조건은 유덕화의 <천장지구> 냄새가 나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만들어 달라는 거였고. 그때 이미 저예산 B무비에 열광했기 때문에 그런 조건을 거절하는 건 상업영화 감독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어떤 악조건에서도 창조성은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최재성으로 내정했던 남자주인공이 갑자기 이승철로 바뀌면서 갈등이 생겼죠. 결과적으로 이승철은 힘닿는 한에서 프로답게 했고, 다들 열심히 했어요. 이승철이 방송출연이 금지됐던 때라 팬들이 극장으로 몰려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첫회는 그랬어요. 첫회만(웃음). 스탭들끼리 우리가 해냈다고 감격했는데 2회부터 텅텅 비었어요. 서른에 데뷔했다 싶어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다음 영화 <삼인조> 찍을 때까지는 계속 글쓰면서 보낸 시간이었어요. 그 적은 원고료와 아내의 지독한 알뜰함으로 근근히 살았지요. 그 사이에 엎어진 시나리오는 셀 수도 없어요. 제작이 확정된 다음에 파놓았던 명함만 열개가 넘었으니까. 95년쯤인가 안동규(영화세상 대표)형이 프랑스에서 <레옹>을 보고 와서는 그 영화처럼 폭력적인 총싸움 영화를 만들자고 하더군요. 나야 안봤으니까 상상도 안되고, 마침 그 전에 해보고 싶었던 기획이 이종대, 문도석의 칼빈총 강도사건이어서 그걸 모티브로 <삼인조>를 준비하게 됐죠. 처음 시나리오는 완전히 달랐어요. 거칠고 난폭하게 가려고 했죠. 직전에 봤던 아벨 페라라 같은 감독의 영향도 있었고. 그런데 중간에 제작사가 바뀌고 시간을 끌면서 영화가 변질돼 주류영화에 가까워져 버린거지요. 제작자 탓이라기보다는 제가 잘 못한 거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첫 영화보다 <삼인조>가 훨씬 후회되고 더 한심하게 느껴져요. 결국 두번째 영화도 흥행, 비평 모두 실패했죠. 보통같으면 그게 유작이 됐을 거에요.
복수 완결편 주연은 이영애, 편집권 배제 할리우드행 갈등
또다시 시나리오 몇개씩 가방에 넣어서 제작자들 찾아다니는 보따리 장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 명필름 심재명 대표한테 설명했던 아이템중에 <복수는 나의 것>도 있었는데 거절당했고. 그런데 심 대표가 <삼인조>를 잘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소설 의 감독을 제안해왔고 소재나 미스테리 플롯이 괜찮아 보여서 덥석 한다고 덤빈 거죠. 안한다면 또 어떡하겠어요(웃음).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거고.
독특한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다.
전에는 내가 상업영화감독이라고 말할 때 입장료 받고 내 영화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의미가 좁아지는 것같아요. 좀더 적극적으로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영화를 만들자는 건데 가장 큰 이유는 배우와 스탭들이예요. 칭찬받고 상받는 것도 좋지만 흥행보다 이 친구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건 없거든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맥빠져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죠. 다만 상업영화이되, 독특한 상업영화를 하자는 생각이예요. 흥행도 독특해야 잘되잖아요. 또 관습에만 매달리면 만드는 일도 지루해지니까. 할리우드 진출이 망설여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예요. 칸에서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감독 제안을 해오면서 하는 말이 최종 편집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갈등하고 있죠. 만약 한다면 웨스턴이나 에스에프를 찍어보고 싶고, 그쪽에 그런 말도 했어요. 한국에서 찍을 수 있는 영화를 굳이 할리우드까지 가서 할 이유는 없잖아요.
박찬욱은...
1963년 8월23일 서울출생
건국대부속중학교, 영동고등학교
1987년 서강대 철학과 졸업(82학번)
작품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삼인조>(1997)
<공동경비구역 JSA>(2000)
<복수는 나의 것>(2001)
<여섯개의 시선-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
<올드 보이>(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