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가 레드 카펫을 밟기 하루 전인 5월14일 밤 10시, 배우 최민식을 만났다. 일부러 늦은 밤을 택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한낮의 크로와제트 거리는 인파로 미어터진다. 그렇다고 그를 반라가 즐비한 해변가에 세워놓는 건 예의가 아니다. 둘째, 그가 어둠이 내린 칸의 거리에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될 것 같았다. 배우 최민식은 새 작품에 들어가면 언론과의 접촉을 완전히 끊다시피한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던 그를 지면으로 초대해준 건 뜻밖에도 칸이었다. 그는 기꺼이 <씨네21>과 함께 칸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이야기는 가볍게 시작됐으나 ‘배우는 죽는 순간 창작의 작업이 끝난다’는 말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2년 만에 칸에 오니까 어떤가.
솔직히 별 감응이 없다. 한번 겪어봐서 그런가. 기분 좋은 건 정말 뜻밖의 경사라서. 난 비경쟁으로 확정됐다고 들었었다. 영화의 특색이나 모양새에서 순수히 영화적 의미로만 어필했구나, 소통이 됐구나 하는 의미에서 기쁘다.
<올드보이>가 장르영화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칸도 변화를 모색한다고 들었다. 지난해 라인업이 아주 안 좋았다고 하던데. 현재 세계의 주류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영화들 중심으로 기획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런 점에서 <올드보이>를 택한 게 아닐까 싶다. 한국 현역 감독 중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하고 자유분방한 감독을 말이다.
배우로서 영화제에 가는 게 어떤 기분일까. 아무래도 감독 중심의 영화제인데.
칸! 칸! 영화제 명성이 대단하다. 뭔가 수상하면 굉장한 명예이기도 하고. 이런 현실적인 면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제 우리 이야기가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하는구나, 그런 소통의 장에 당당히 참석한다는 데 의미를 둔다. 영화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어떻게 느꼈는지 들으러 왔다.
촬영 중인 <꽃피는 봄이 오면>의 현우 캐릭터에 몰입해야 하는데 <올드보이>의 ‘오대수’를 다시 기억해야 하는 게 혹시 방해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너무 피곤하게 작업하게 되는 거고. <꽃피는…>은 50% 정도 찍었다. 몰입보다는 오랜만에 친구들하고 막걸리 한잔 하는 기분으로 편하게 찍고 있어서 괜찮다.
이상하게도 <파이란> <올드보이> <꽃피는…>의 주인공은 깊은 나락으로 추락한 상태에서 로맨스를 시작한다.
<꽃피는…>은 나락까지는 아닌데.
그럼 패배감?
<꽃피는…>의 현우는 일상적인 피로에 지쳐 있다. 잘 나가는 뮤지션은 아니지만 아주 불행한 건 아니고, 전형적인 비극을 안고 있는 캐릭터도 아니다. 누가 봐도 그 정도의 피로감을 안고 사는 인물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이번에는 해피엔딩인가.
글쎄, <올드보이>나 <파이란>에선 목졸려 죽거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갖고 살아가야 했지만, 여기선 뭔가 다시 시작한다. 완전히 정리되고 회복되기보다 나름대로 해법을 찾아서. 우리 인생사가 그렇지 않나. 무 자르듯 여기까지 고생했고 이제부터 행복 시작, 그런 게 아니라 여기저기 찢어지고 흠집나고 긁히는 상황에서 뭔가 재정비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영화가 그래선지 얼굴에서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배우는 배역에 따라서 삶의 모양새가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면 개인 최민식의 피로감은.
70, 80은 늘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떨어지거나 올라가는 것 없이. 사는 것 자체가 피곤하니까.
<올드보이> 이후 <꽃피는…>의 선택이 의외의 선택이라는 반응이 많지 않았나.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나의 선택이지. 그 전에는 자극적이고 센 영화들이었다. <파이란>도 사실은 세거든, 서정성을 많이 담았지만 감정의 진폭이 큰. <올드보이>는 말할 것도 없고. 육체적으로 쉰다기보다 정신적으로 해방되고 싶은, 그러니까 다른 음식을 맛보고 싶은, 청양고추에 고추장에 비벼먹다 속도 좀 쓰리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부드러운 죽으로 좀 달래고 싶었다. 한겨울에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방에 들어와 아랫목에 손 넣으면 훈훈해져서 옷도 안 벗고 잠들어버리는 느낌의 시나리오였다. 항상 그랬듯이 흥행여부와 상관없이 시나리오가 준 서정성이나 일상사들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와닿았다. 그런 말랑말랑한 세상에 스스로를 달래고 추스려야 하지 않나 하는. (웃음)
다음번 음식은 뭐가 될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수상 여부에 대한 생각은.
칸영화제라는 고유명사가 개개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천차만별이다. 상 못 받아 안달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담담한 이들도 있고. 만에 하나 <올드보이>로 누군가 상을 탄다면 축하받을 만한 일이고 팀으로서 영광된 일이나 운동선수처럼 금메달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칸에서 상받았다고 그 사람의 작품세계가 완성되는 게 아니니까. 이놈의 일은 죽을 때까지, 밑도 끝도 없이 계속 더 뭔가를, 다른 이야기를 추구해야 한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받으면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는 거지만 여기는 뭔가 새롭고 공감을 같이 했다는 개념에서 상을 주는 영화제니까. 상을 받는 게 결코 종착역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끝없이 가야 한다는 건 부담인가, 더욱 욕망을 자극하는 것인가.
예컨대, 최고를 위한, 외형적으로 세상이 규정한, 칸 그랑프리라고 하면 어쩌면 가장 우수한 영화라는 인정일 수 있으나, 배우로서 연기 인생의 완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연출가로서도 마찬가지고. 난 거기를 올라갈 거야, 난 그것만 잡으면 끝나, 이런 건 없다. 내가 지금 40대이지만 30대의 연기, 20대의 연기, 처음 연극 시작했을 때의 기분, 생각들과 비교하면 정말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더 나이를 먹어서 카메라 앞에, 연극 무대에 섰을 때의 그때 받아들이는 정서는, 사람에 대한 분석은, 세상에 대한 이해는 또 다를 것이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완성이 없다. 죽으면 끝난다. 배우는 죽어야 창작의 작업이 끝난다.
그걸 고통의 연속이라고 받아들이나 즐거움으로 여기나.
고통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고… 알아가는 작업이다.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허무맹랑한 이야기든 사실적인 영화든 다 사람이 나오지 않나.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있을 법한 이야기들. SF든 호러든. 우리 인생도 힘든 게 있으면 즐겁고 기쁠 때도 있듯이. 그 배역에 들어가 그 인물로서 살려고 할 때, 비록 픽션이지만, 염세적으로 라이프사이클이 변한다. 폭력적이다 그러면 터프해지는 것 같고, 민감한 인물이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별일도 아닌 것에 찡해지기도 하고. 난 이런 표현을 즐겨쓰는데, 음악인은 악기를 통해 표현한다면, 우리는 생겨먹은 몸이, 사고방식과 인생관이 악기다. 그래서 내 기분이 꿀꿀하면 몰입이 안 돼. 애로사항이 많은 악기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