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의 대서사시, 음과 양의 조화 속에 끝맺다
자, 그리고 모험은 계속된다…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2부작 대하 펄프액션 드라마 <킬 빌>은 “신부”라 이름 붙여진 슈퍼여걸(우마 서먼)이 마침내 복수를 달성하면서 만족스러운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유혈 낭자한 전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달콤한(?) 사연과 분위기로 이루어진 후편의 내용은 적잖게 놀라운 것이다.
<킬 빌 Vol.2>(이하 <킬 빌2>)을 정확히 봄바람 같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음성을 낮춰 매우 저음으로 말하는(물론 “말한다”는 점을 좀더 강조하고 있겠지만)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전편의 노골적인 내용이 양(陽)의 기운에 해당한다면 후편의 미묘함은 음(陰)의 기운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킬 빌2>는 마치 즐기기라도 하듯이 살육의 장면들을 뒤로 미루어놓다가 어떤 장면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예 카메라를 빼버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전편에서라면 거의 로드러너 만화 수준으로 대사가 없었을 장면들에서 <킬 빌2>는 딱 좋을 정도로 수다스럽기까지 하다. 거의 모든 대결장면들이 캐릭터들이 격돌하기 전 황당할 정도로 장황하게 이어지는 설전을 거치는데,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극악무도한 빌(데이비드 캐러딘)이 지루한 거짓말과 대금 연주의 대가임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가히 그 절정이라 하겠다. 전편이 블랙스플로이테이션과 야쿠자영화의 요소들을 뒤섞어놓았다면, <킬 빌2>는 마카로니 웨스턴과 60, 70년대 홍콩 무협영화 사이를 왔다갔다하는데, 이 두 세계를 각각 주재하는 두 신성(神聖)은 세르지오 레오네와 호금전이다. 영화 <킬 빌2>의 핵심은 성질 사나운 흰 눈썹의 승려 파이 메이(타란티노가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었던 이 역할은 왕년 쇼브러더스 영화의 베테랑 유가휘가 맡아서 소화해냈는데, 똑똑한 결정이라고 생각된다)가 여주인공을 연습시키는 장면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챕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잡한 와이드 화면으로 휑한 세트에서 진행되는 이 장면은 기괴한 분장과 엉성한 극전 비약, 그림자 무술장면의 삽입 등 70년대 무협영화에 대한 유쾌한 오마주이다.
<킬 빌2>는 숱한 회상장면과 엉터리 지식들, 여자들끼리의 쿵후 싸움, 배경투사 촬영장면, 그리고 70년대 브로드웨이 관객의 즐거운 야유를 받기에 충분했을 속임수와 익살로 넘쳐나지만 강한 암시의 작용 역시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요소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주인공의 생매장 장면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킬 빌2>가 전편보다 반 시간 이상 길고 훨씬 신중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편보다 더 빈약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타란티노가 전편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서이거나 (사실 이것보다는 훨씬 개연성이 높아 보이는데) 상업적인 요구에 따라 작품을 분할해서 상영하게 된 상황을 활용하기 위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이야기 구조를 하나의 방편으로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조적으로 보자면 <킬 빌2>의 마지막 시퀀스는 전편의 시작과 함께 일종의 운율을 형성하는데, 여기에는 다소의 단순화 및 재구성된 연대기적인 느낌도 있다. 하지만 좀더 큰 리듬감은 상실되어 있는데 사실 전편 <킬 빌 Vol.1> 속의 어떤 장면들은 후편에서, 그러니까 주인공의 이름이 비어트릭스 키도임이 밝혀지면서 좀더 복잡한 과거의 이야기를 암시하는 부분에서 쓰일 때 훨씬 큰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킬 빌1, 2>는 누적된 전체로서의 힘을 보여주고 있으며, 타란티노는 우마 서먼을 액션영화의 창대한 하늘 속으로 날려보내고 있다. 그녀는 가히 전설적 흥행사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의 작품 속에 투영된 마를렌 디트리히(역주: 초기 무성영화 시대의 유명 여배우, 스턴버그 감독의 탐미적인 작품에 출연하였으며 우아한 각선미로 그레타 가르보와 함께 할리우드의 양대 여왕으로 군림했었다)의 타란티노적 현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불러일으킨 곡예와도 같은 대유행의 바람은 사실 그녀의 연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캐러딘의 연기 역시 훌륭한데 그는 마치 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 지난 30년간을 침묵하며 기다려 온 듯하다.
타란티노의 페르소나는 이미 딱딱하게 굳은 지 오래이지만 그의 열정만은 여전히 새롭게 다가온다. <킬 빌> 시리즈는 사랑보다 신앙의 산물이라는 느낌이다. 굉장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의 재활용(?)이나 70년대 사이키델릭 음악의 도용, 그리고 정교한 카메오의 활용 등 이 모두는 가히 히브리어로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맞먹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경외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네가 하토리 한조의 검을 가지다니!?!?”와 같은 억지 대사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가?).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부활할 뿐만 아니라 타란티노는 <킬 빌> 시리즈를 통해서 자기 스스로의 성서적인 예시를 보여준다. 영화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아마도 “오우!-내-젖꼭지-바”( My Oh My titty bar)의 이니셜이나, 이 이야기가 <쇼군자객>의 버전으로 계속될 수도 있음을 말하는 조롱하는 듯한 힌트에서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킬 빌> 시리즈는 괴상하고 웅장한 하나의 앙상블이다. 타란티노는 영화 속에서 40년대의 TV만화 클립으로 보이는 장면을 통해 (이 장면에서 한 우스꽝스러운 동물이 다른 동물에게 “까마귀는 네가 존경할 만해”라고 말한다) 스스로에게 경배를 보낸다. 이제 여주인공 “신부”의 임무는 끝났다. 하지만 영화의 운명은 전편과 후편이 제대로 “결혼”(?)을 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짐 호버만/ 영화평론가·<빌리지 보이스> · 번역 권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