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1982)의 여자 안드로이드를 기억하는가. <킬 빌>의 애꾸눈 킬러로 등장한 대릴 한나를 발견하는 순간 그 이미지가 곧바로 떠오른다. 탐스러운 금발을 푸석푸석한 파마로 대신하고, 짙은 눈화장으로 표정을 숨긴 채, 기계 같은 몸을 무기처럼 사용했던 <블레이드 러너>의 프리스 이후, 긴다리를 하늘거리는 푸른 지느러미 속에 감춘 <스플래쉬>(84)의 ‘인어공주’를 지나, <투명인간의 사랑>(1992), <투 머치>(1996) 등 금발 미녀의 몇 가지 변주만을 보여준 영화까지, 흘러가는 세월 속에 금방이라도 잊혀질 듯했던 그가 그렇게 돌아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거짓말 같은 금발, 그리고 더욱 거짓말 같은 몸을 가진 이 배우는 자신의 신체를 왜곡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번에는 검은 안대로 푸른 눈을 가리고, 모든 감정을 얼굴에서 지워버렸다. 저마다의 사연을 남기고 죽어간 데들리 바이퍼 단원(딸 앞에서 살해된 버니타,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목격했던 오렌 이시, 브라이드가 안겨준 배신감에 엄청난 학살을 감행했던 빌)들에 비해 별다른 과거가 없는 엘르 드라이버는 다소 밋밋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없지만 그만이 가진 것들이 있다. 브라이드를 살해하려 병원에 침투한 뒤 간호사복과 함께 안대까지 ‘간호사용’으로 바꾸는 센스(?), 혹독한 훈련을 못 견디고 사부에게 대들어 단번에 ‘눈알 뽑힌’ 뒤, 가차없이 스승을 독살해버리는 ‘성깔’ 등이 그것이다. 물론 우마 서먼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를 향한 타란티노의 배려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깨닫게 되는 증거들이다.
런던에서 연극 공연 중이던 대릴 한나를 찾은 타란티노는 앞뒤 설명도 없이 “당신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며 출연제의를 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보내주기 전에 75개가 넘는 비디오 테이프들을 보내줬고, 나는 공부하는 기분으로 70년대 홍콩영화, 일본 애니메이션, 스파게티 웨스턴 등을 봤다. 예전부터 타란티노 감독의 광팬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그 시간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가능한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려고 했다.” 자신이 연출한 단편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기도 했던 이 감독지망생은,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앞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대릴 한나는 이제야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깨닫게 된 것 같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전율의 텔레파시>(The Fury, 1978)로 데뷔한 이후 30년이 걸린 일이다. 그는 최근 미국 독립영화계의 대부 존 세일즈(<메이트원>) 감독의 최근작 〈Casa de los babys>(2003)과 그 감독의 차기작 <은빛 도시>(Silver City)에 출연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이클과 마크 폴리시 형제의 기괴한 작품 〈Northfork>에는 “꽃”(말 그대로!)으로 등장했다. 모험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보면 어떤 친구는 폭삭 늙었는데 어떤 친구는 몇 십년 전과 그대로다. 전자는 ‘난 이제 배울 게 없어. 그냥 여기 눌러 앉아도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려고 애쓰는 이들이다.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을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등, 다른 단계로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것은 너무나 재밌는 일이다.” 완벽한 외모를 가진 여배우가 진짜 연기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30대 이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할리우드의 생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 시작을 할 수 있는 배우들도 한정된 상황. 관객의 입장에서 지금의 대릴 한나는, 기꺼이 시선이 가는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