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투명인간의 자신감, <인어공주>의 전도연
2004-06-24
글 : 김도훈
사진 : 이혜정

스튜디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는 전도연은 오늘따라 조금 심술궂어 보인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고단한 작업이었던 <인어공주> 촬영의 여독이 아직 남아서일까. 기나긴 여정을 끝낸 노곤함에 깊은 잠을 청하고 싶지만, 밀려 있는 인터뷰들이 놓아줄 리 없다. 그는 지금 해저로 숨어버리고 싶은 인어공주다. “젊음이나 외모나 혹은 건강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만인 것 같아요. 원래 저는 아파도 젊음으로 버텨왔는데 요즘은 피로도 쉽게 느끼네요.” 하지만 사진 촬영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야무진 입가에 웃음이 번져난다. 예의 그 코끝을 찡그리는 기분 좋은 웃음으로부터 짭조름한 바다내음이 맡아지는 것 같다.

현실의 기술, 판타지의 감각

<인어공주>에서 전도연은 평범한 은행 직원 나영과 고두심이 연기한 억척스런 때밀이 어미 연순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다. “나영은 현실이고 연순은 판타지에요. 어떤 꿈이나 희망 혹은 이상이어도 좋고. 연순에게는 현실적인 무게감이 없어요. 반면에 나영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온통 현실일 뿐이죠.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현실의 무게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연순의 모습이 나중에는 그런 때밀이 억척어미로 변해가는 것이겠지요. 젊은 날의 연순이라는 캐릭터가 지나치게 이상화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비약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실과 판타지의 인물들을 동시에 연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처음엔 선뜻 연기하기가 두려웠어요. 하지만 한 캐릭터에 치우치지 않고 두 인물을 모두 잘 대변하고 싶었죠. 통제력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자연스럽게 두 캐릭터의 균형을 잘 맞춘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죠.” 게다가 전도연이 연기한 두 인물을 합성하는 과정은 기술적인 난이도도 상당했을 터. 기술적인 간극을 좁히며 자연스럽게 연기를 조율한 그에게서 든든한 자신감이 비친다.

전도연의 투명함, 캐릭터의 존재감

그의 자신감은 사진 촬영 중에도 여전하다. 옆에 놓여 있는 사다리를 가져와 사진작가에게 부탁한다. “이렇게 사다리에 걸터앉으면 다리가 예쁘게 나오지 않을까요?” 까르르 웃어젖히는 그. 자그마한 체구와는 달리 그는 현장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발산하는 배우다. 하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들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배우 전도연의 존재감이 아니라 캐릭터 자체의 무게였다. “영화 속의 전도연은 없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죠. 이건 여배우에게 치명적인 단점일 수도 있어요. 내가 내 영화를 봐도 일관성이 없어 보일 때가 있고. 단지 일관된 건 나는 끝까지 사랑을 이야기하는 배우라는 것. 하지만 저는 배우 전도연이 두드러지는 것은 바라지 않아요. 그런 것을 추구하는 배우가 나인 것 같아요.”

전도연의 현재, 여배우의 미래

<인어공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은 전도연은 새로운 미래를 채울 준비를 하는 중이다. “이 영화가 내 배우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많은 것을 버리고 쏟아내고서 다시 시작하는 거니까. 좀더 솔직해질 수 있고, 좀더 순수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미래를 이야기하는 전도연은 사뭇 비장한 각오마저 지니고 있다. “여배우 기근이라고들 이야기하죠. 하지만 최민식이, 송강호가 처음부터 나타난 건 아니거든요. 비유하자면 먹을 수 있는 먹이가 있기 때문에 그런 동물들이 나타난 거죠. 그런 먹이도 없는 상황에서 ‘왜 그런 동물이 없어’라고 말하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저는 여성 캐릭터가 중심인 <인어공주>나 <청연> 같은 영화가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크린쿼터라는 제도가 있을 때 좀더 모험을 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다양성을 갖추어나가야 되는 거 아닐까요. 언제까지 안전한 제도 속에서 똑같은 영화만 만들면서 안주하겠어요.”

전도연은 자신의 미래를 보며 한국 여배우들의 미래까지 함께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 부담감은 제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것 같아서 싫어요. 전 제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자유롭게 살 거예요”라고 손사래를 치며 웃는 전도연. 하지만 절정의 순간, 잠시 자신을 뒤돌아보는 여유마저 찾은 그에게서 영리한 자신감이 번득인다. 스크린 속의 전도연은 없다. 하지만 배우 전도연은 있다. 놀랄 만큼의 무게감을 지니고서. 전도연은 모든 것을 <인어공주>에 쏟아부었다지만, 32살 작은 체구의 여배우의 미래가 더욱 기다려지는 것은 바로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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