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저보고 양의 탈 쓴 변태래요” <인어공주>의 박해일
2004-06-25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무릇 배우는 천의 얼굴을 가진 존재라고 일컫지만 실제로 그런 배우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젊은 배우들 사이에서는. 그중 예외적인 존재라면 박해일(27)이 아닐까. 지금까지 불과 5편의 영화를 찍은 그에게 ‘천의 얼굴’ 운운하는 건 호들갑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에서 문학청년같은 풋풋함과 착실한 노동자의 묵묵함, 잔인한 살인범의 섬뜩함을 동시에 내뿜던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얼굴에 담긴 놀라운 진폭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이 영화에서 연쇄살인범으로 ‘뜬’ 다음 신뢰도가 중요한 은행 광고의 모델로 등장했다는 것도 배우 박해일이 지닌 아이러니한 면모를 드러내는 한 예다.

<인어공주>의 진국은 박해일이 가진 여러 겹의 얼굴 가운데 가장 착하고 가장 따뜻한 면을 뽑아낸 인물이다. 그에 의하면 진국은 “남들 부탁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것 같고, 의외로 우유부단한 면도 있는”, 그래서 영화 <인어공주>에서 나영이 말하듯 “착해서 남을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다. 물론 중년의 진국은 답답함에 가까운 소심함과 무력함으로 주변을 속타게 하지만 박해일이 연기한 스물셋의 진국은 모든 여성이 기대고 싶을 만큼 사려깊고 다감한 인물이다. 그가 등장하는 커피 광고나 아이스크림 광고 속 인물을 닮기도 했다.

풋풋한 청년·섬뜩한 살인범 이번엔 답답한 착한 남자

“<살인의 추억>이나 <질투는 나의 힘>에서보다는 선명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맘편하게 연기했어요. 촬영 전 준비라면 글쎄, 착하게 살자 정도 일찌감치 촬영장소인 우도에 내려가서 지냈어요. 낚시도 하고. 손바닥만한 동네라 마을어른들하고 인사 나누고 조금씩 안면을 트면서 마을 청년회장 대접을 받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섬만큼이나 평화로웠던 시간이었던 것같아요.”

<인어공주>에서 진국이 등장하는 판타지 부분은 멜로의 성격이 짙지만 박해일은 멜로보다는 “자식이 모르는 부모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는” 데 매력을 느껴 참여하게 됐다. “부모님이 젊었을 때의 연기라고 해서 60~70년대 영화처럼 목소리를 ‘까는’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웃음). 촬영할 때는 잘 몰랐는데 시사회 때 영화를 보면서 ‘부모한테 좀 잘하지 그랬냐’는 후회도 들고 머릿 속이 복잡해지더군요.” 그래도 <살인의 추억> 때 이웃 어른들마다 “거기 아들이 범인이여” 묻는 통에 부모님이 곤혹스러워했던 걸 떠올리면 <인어공주>는 편하게 부모님을 극장에 보내드릴 수 있는 영화가 될 것같아 다행이란다.

부모님 시대 연기 복잡미묘 비슷한 이미지 머물기 싫어

“이 양의 탈을 쓴 변태야.” <인어공주>를 보고 난 주변 동료들은 그에게 이렇게 농담을 건넨다고 한다. 그는 분명 <인어공주>에서 ‘양’을 연기했다. 그러나 박해일이 아니었더라면 진국의 밝고 생기있는 젊은 날과 어둡고 무기력한 노년이 무던하게 봉합될 수 있었을까 싶다. 그에게 붙은 ‘변태’라는 짓굳은 별명은 실은 가능성 많은 젊은 배우에게 보내는 질투어린 찬사같다. “누구나 그럴 수 있겠지만 어떤 역할을 맡으면 그런 사람이 정말 돼가는 것같아요. 새로운 역을 맡는 건 전에 쌓은 성격이나 이미지를 깨는 과정이고, 그렇게 자꾸 깨나가고 싶어요. 제 시기에는…. 그게 맞는 것같아요.”

<인어공주> 리뷰. ‘엄마·아빠 젊을적에’애절한 희망 엿보기

우체국 직원 나영(전도연)은 같은 우체국에 근무하는 아버지 진국,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어머니 연순(고두심)과 함께 산다. 어머니는 수시로 침을 뱉는 버릇이 있고 말도 거칠게 한다. 남이 버린 가구를 집에 가져와 닦아 쓰는 억척어멈형이다. 평소에 말이 없는 아버지는 무기력해 보이기만 한다. 어느날 아버지가 더 일을 못하겠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한바탕 욕을 해댄다. 이어 아버지가 가출했는데도 어머니는 찾을 생각을 안 한다. 아버지가 큰 병에 걸렸음을 뒤늦게 알게 된 나영은 우도에 가있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중하층 가정의 별 볼일 없는 생활을 사실적으로 중계하는 <인어공주>의 도입부는 우울하다. 부모가 싫은 나영은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런 나영이 우도에 도착한 순간, <빽 투 더 퓨쳐>처럼 수십년전의 과거로 시간이동한다. 우도의 맑은 바다 속으로 해녀들이 물질하는 이 과거의 세계는, 우울한 도회지의 현재와 정반대로 밝고 생명력이 있다. 거기서 나영은 젊은 시절의 아버지 진국(박해일)과 어머니 연순(전도연 1인2역)을 만나 둘의 사랑이 맺어지는 과정을 온전히 지켜보게 된다. 연순은 고아로 남동생과 함께 해녀일 하며 살고, 진국은 우체국 직원으로 자전거를 타고 편지를 배달한다. 연순은 진국과 마주치기만을 기다리며 살면서도 낙천적이다.

연순의 시점에서 중계하는 이 사랑에선 희망의 이미지가 잡힌다. 수십년 뒤 사랑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볼품 없는 생활만 남은 둘을 이미 보고 난 뒤에 만나는 이 희망은 동시에 애절하기도 하다. <박하사탕>처럼 과거로 가면서 더 맑고 순수한 인물을 만나게 하는 이런 구성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안타까움과 무게감을 전한다. 순박한 멜로를 섞어 그 정서를 배가시키는 <인어 공주>의 연출은 정갈하고 짜임새가 있다. 또 <박하사탕>처럼 과거로 돌아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현재로 다시 와서 화해를 시도한다. 딸 나영과 어머니 연순의 모녀간, 세대간에 이뤄지는 이 화해는 안타까움을 조금 덜어준다. 그러나 ‘삶은 보잘 것 없고 다 그렇게 늙어간다는 걸 따듯하게 받아들이자’는 식의 전언이 속깊어 보이진 않는다. 노년을 비교대상으로 전시하는 태도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생기발랄한 젊음’ 대 ‘지리한 노년’이라는 단순대비를 통해 영화는 순박함과 애절함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끌어낸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박흥식 감독의 두번째 영화다. 7월2일 개봉.

사진=윤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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