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헐벗은 민중에게 위로가 된 것은 멜로드라마였다. 특히 일본, 한국, 홍콩 3국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멜로드라마로 전쟁의 상처를 씻어내고 있었다. 영상자료원이 창립3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기획전인 ‘1950∼60년대 동아시안 멜로영화전’은 전후 동아시아 3국에서 주류로 부상한 멜로영화들을 통해 빈곤 속에 꽃핀 풍요로운 영화적 유산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영화제는 7월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서울아트시네마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며 관람료는 3천원이다. 7월6일 오후 6시30분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같은 주제로 3국 평론가가 발제하는 심포지엄도 열릴 예정이다.
먼저 일본영화를 살펴보면 50년대는 일본영화가 국제적 명성을 얻었던 영광의 시대였다.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으로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을 시발점으로 미조구치 겐지가 프랑스 평론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당시 대중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홈드라마나 멜로영화는 국제적 명성과 거리가 멀었다. 오즈 야스지로가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잊어선 안 될 인물이 또 있으니 바로 나루세 미키오다. 이번 상영회에서 만날 <산의 소리>(1954)(사진)는 <부운>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등과 더불어 나루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외도하는 남편을 둔 며느리와 이를 눈치챈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삶의 비극성을 가혹하리만치 사무치게 표현하는 나루세의 세계에 흠뻑 빠져볼 수 있는 영화다. 오바 히데오의 <당신의 이름은> 3부작(1953∼54)은 당시 멜로드라마로서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작품이다. 전쟁 말기에 우연히 만났다 헤어진 연인이 온갖 우여곡절로 맺어지지 못하는 이야기. 일본 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이 영화에 대해 “이런 종류의 감상적인 비련드라마의 최후의 대히트작”이라고 말했다. <스자키파라다이스, 적신호>(1956)도 비슷한 계열의 영화로 분류된다.
한편 홍콩은 1960년대 무협영화 붐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대 멜로드라마가 번성했다. 한자로 표현하면 ‘문예영화’라고 할 수 있는 홍콩의 멜로드라마는 한국의 문예영화와는 맥락이 다르다. 국내에서 소설 원작의 영화, 문학적인 영화를 의미하는 반면 홍콩의 문예영화는 주로 여성관객을 타깃으로 삼은 영화들이다. 장르도 다양해서 가족영화, 사회드라마, 코미디, 뮤지컬 등이 문예영화에 포함된다. 이번에 소개되는 <가녀지가>(1948), <일판지격>(1952)(사진), <위루춘효>(1953), <한야>(1954), <동연>(1968) 등 5편이 문예영화에 속하는 작품들. 이중 <위루춘효>는 가난한 세입자들이 한집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이야기로 문예영화가 단순히 남녀의 사랑을 다룬 장르가 아님을 보여준다. <일판지격>도 세입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슷한데 두 영화 모두 좌파 성향의 사회비판드라마로 보인다. <한야>와 <동연>은 멜로드라마의 정의에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홍콩영화의 상업적, 대중적 잠재력을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동시대 한국영화가 궁금하다면 <자유부인>(1956)에서 <귀로>(1967)까지 4편의 영화가 있다.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은 신문 연재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으로 소설의 모델이 된 인물이 항의를 하는 등 논란 속에 대단한 흥행성공을 거뒀다. 1969년, 1981년, 1990년 세 차례 리메이크됐으나 원작의 흥행기록을 깨지는 못했을 정도다.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는 한국적 팜므파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당시 영화로 보기 드물게 모던한 느낌을 준다. 유현목 감독의 <그대와 영원히>(1958)는 자기 애인이 친구의 아내가 돼 있는 걸 목격하는 전과자 이야기이고, 이만희 감독의 <귀로>는 성불구자인 남편을 둔 아내 이야기로 전쟁과 여성, 도시 공간을 모던하게 결합한 60년대 후반의 대표작.